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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2. 2024

김남희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이제 우연의 시간으로 기억되거나 예견되는 저 먼 여행들...

*2021년 5월 30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주말에 커트를 하는 동안 미용사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 시간 모은 항공사 마일리지로 가족이 함께 떠나는 하와이행 티켓을 끊었는데, 출발일이 작년 10월이었단다. 아예 취소를 하려다 마일리지 사용 기한이 지날 수 있어 올해 10월로 티켓을 변경하였고 했다. 올해는 가능할까요? 라고 물었는데, 흐음 길게 호흡을 끌며 대답을 미루자, 힘들겠지요, 라고 알아서 답을 하였다. 다행이었다.


  “그곳에는 거미줄처럼 촘촘한 골목마다 낡고 좁고 먼지 가득한 가게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한 그릇에 400원짜리 리마콩죽이 화덕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분식집이 있는가 하면, 가죽옷을 입은 낙타 인형이여 금박을 입힌 칼 따위의 조잡한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있고, 오렌지를 잔뜩 실은 당나귀를 끌고 가는 남자들을 지나쳐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달고 뜨거운 박하차를 내는 찻집을 건너면 무두질을 하는 가죽 가게의 송장 썩는 냄새에 코를 틀어막고 지나가야 하는 골목이 나오고, 번쩍번쩍 빛나는 궁전이 숨어 있는 골목에는 세상의 모든 향신료가 탑처럼 쌓인 가게가 늘어선 곳이었다.” (pp.52~53) 


  위의 문장은 모로코의 페스를 그려내고 있다. 그곳이 어디인지 짐작조차하기 힘들지만 저자가 애써 묘사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는 있다. 어느 해이던가 보통 이상으로 여행을 애호하는 아내의 직장 동료와 한 차를 탄 적이 있다. 가장 좋았던 여행지를 물었을 때 그녀가 답한 곳이 바로 모로코였다. 그곳에서라면 틀림없이 이국의 정취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아래는 저자가 묘사하는 모로코의 또 다른 도시 마라케시이다. 


  “... 특히나 이 도시의 심장 젬마엘프나 광장은 온갖 냄새와 소리로 가득한 곳이었다. 아프리카 토속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이 있는가 하면 코브라 앞에서 피리를 부는 남자들이 있었고, 정체불명의 온갖 약들을 파는 약장수 곁에는 천년의 전설을 풀어놓는 이야기꾼 할아버지가 구수한 입담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헤나 문신을 해주는 여인들이 여행자의 팔을 잡아끌고, 갓 짜낸 오렌지주스를 파는 노점 곁으로는 달팽이찜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오감을 팽팽하게 당기는 풍경이었다. 나는 이 광장의 한 모퉁이에 허름한 방을 얻고 이 도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p.248) 


  《외로움이 외로움에게》는 이국의 여행지라는 장소도 장소이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 더욱 주목하는 여행 산문집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 중 어떤 이는 “너와 하고 싶네. 봄이 앵두나무와 벌이는 그 일을” 이라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적힌 벽을 사진으로 찍어 저자에게 보낸다. 그런가하면 저자는 여행지에서 만난 P에게 보내는 편지에 송두율 교수의 인터뷰 내용 중 ‘경계인’에 대한 부분을 포함시킨다. 


  “어떤 경계의 이쪽이나 저쪽 어느 한 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과거의 추억 속에서 살면서 그 속에서 자기 존재의 뿌리를 관습적, 본능적으로 확인합니다. 그러나 이쪽과 저쪽 사이의 경계에서 제3의 무엇을 구한다면 아무도 밟지 못한 미래의 고향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유토피아처럼 보일 수 있는 이 미래의 고향이 선에서 면적으로, 면적에서 공간으로 변화하며 넓어질 때 그 안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공존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경계인’이지요.” (p.78) 


  그렇게 책 속의 저자와 저자가 만난 이들은 거리와 시간에 구애받으면서도 구애받지 않는다. 그들의 여행지에서의 인연인 고국으로 돌아온 다음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기억되고 어떤 이들은 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사진으로 남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말로 남을 것이다. 아래 문장의 ‘그’는 우리가 잘 아는 가수 이문세이다.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을 했다. “이런 말하기 정말 미안하지만······”, “내가 하는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우린 살면서 이런 말들을 너무 쉽게 하면서 살아간다고. 하기 미안한 말과 들어서 오해할 수 있는 말은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게 좋은 거라고.』 (p.324)


  가능한 시간과 필요한 돈이 준비된다면 언제든 여행을 떠날 수 있던 때가 있었다. 여행을 크게 즐기는 타입은 아니어서 국내 여행조차 지지부진하였다. 언제든 떠날 수 있었기 때문에 크게 아쉬워할 일도 아니었다. 지구의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아무도 몰랐다. 코로나가 본격화되기 바로 직전 연도에 아내와 함께 베트남을 다녀온 것은 그래서 큰 우연이었다. 아내와 나는 종종 그 우연의 시간을 이야기하곤 한다. 



김남희 /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 웅진지식하우스 / 359쪽 / 2017 (200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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