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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11시간전

윌리엄 트레버 《펠리시아의 여정》

순진한 선과 순수한 악에 대한 현대 사회라는 공동의 반대편...

  아일랜드의 처녀 펠리시아는 결혼식에서 만난 한 청년과 짧은 연애를 했다. 그는 잠시 고향 집의 엄마를 방문했던 터였다. 청년은 영국으로 돌아갔고 펠리시아는 아이를 가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청년의 엄마를 찾았지만 문전박대를 당할 뿐이다. 펠리시아는 증조 할머니의 돈을 들고 청년을 찾아 영국을 향한다. 펠리시아에게는 그가 말해준 지역명, 그가 잔디깎이 공장의 창고에서 일한다는 정보뿐이다.


  “힐디치 씨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는 십여 년 넘게 124킬로그램을 유지하며 500그램 정도도 찌거나 빠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오십사 년 전 조지프 앰브로즈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힐디치 씨는 두껍고 동그란 안경을 쓰고 비둘기색 머리카락을 짧에 유지하며, 늘 조끼를 받쳐 입은 양복 차림에 줄무늬 넥타이는 매듭을 작고 단단하게 만들어 매고, 하루에 두 번씩 광을 낸 구두를 신고 곧잘 기분좋은 미소를 짓는다. 종종, 그의 얼굴 여기저기 달라붙은 살집이 뒤로 밀리며 잘 관리한 이가 드러날 때면 안경 뒤로 흐릿했던 눈동자에 반짝 생기가 돈다. 그의 목소리는 갸날프고 높다.” (p.17)


  그러나 펠리시아가 겨우겨우 찾은 영국의 산업 단지에는 청년이 말한 것과 매치되는 공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펠리시아는 이때까지 아일랜드를 떠나 본 적이 없다. 이 어리숙하고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는 처녀를 발견하고 처음으로 관심을 보여준 것은 한 공장의 구내식당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힐디치 씨이다. 소설은 이 잘못된 만남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펠리시아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그렇게 시작된다.


  “펠리시아는 모임의 집에 며칠간 머물며, 아침이면 그곳을 나와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돌아다니고, 거리에서 사람들 얼굴을 살펴보거나 다른 도시에 있는 공장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기도 한다. 가보면 이미 다른 곳으로 바뀐 공장인데 사람들이 잘못 알고 알려준 경우가 잦았고, 그런 식으로 그녀는 대형 기계 임대사업소, 채굴기와 굴착기 수리소, 컴프레서와 땅 파는 드릴 제조공장에 대해 알게 된다. 잔디깎이와 관련된 곳이면 어디든 계속 찾아가는 동안 그녀는 낡은 자동차들이 분해되어 무더기로 쌓인 고철처리장을, 목재소를, 건축 현장을, 양조장을 지나친다...” (p.141)


  펠리시아에게 두 번째로 관심을 가진 것은 한 종교단체의 일원들이다. 힐디치 씨로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낀 펠리시아가 그를 떠난 다음에 만난 이들이다. 하지만 펠리시아는 이 종교단체의 합숙소에서도 긴 시간 기거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곳을 떠나지만 자신의 가방에서 돈이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된다. 오갈 데가 없어진 그녀는 결국 다시 힐디치 씨에게 돈을 빌리기로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힐디치 씨가 파놓은 수렁에 빠진 것이라면... 


  “우정이 끝나면 힐디치 씨는 늘 이런 식으로 고통을 겪는다. 어렴풋이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인식하고는 상실감이 너무나 커서 기억에 착란이 일어나는 거라고 여긴다―그들이 떠난 순간이 매번 너무나 고통스러워 자신의 무의식이 그와 관련된 구체적 상황을 지워버렸다고 처음에, 베스가 떠났을 때, 그는 이 기억의 착란이 걱정되어 그 순간으로, 그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보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고 그후로는 자신이 겪은 기억의 소멸을 자비의 선물로, 심지어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영역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p.241)


  결국 펠리시아는 힐디치 씨의 정체를 파악하게 된다. 힐디치 씨는 뜨내기들로 가득한 이 산업 단지에서 표적으로 삼은 여성들을 끌어들이고 또 영원히 사라지도록 만드는 짓을 서슴치 않는 인간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실수 없이 잘 해왔던 그이지만 이번에는 펠리시아가 머물던 종교 단체의 방문으로 인하여 위기에 몰린다. 착란이라는 방식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며 잘 살아왔던 그는 이제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된다. 


  “다시 새벽빛이 밝아오자 아까 문틈을 기웃거리던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를 뒤지다 되돌아와 이번에는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온다. 한때는 방울이 달린 목줄을 했던 이 검은 고양이는 본능을 만족시키기엔 너무나 말랑했던 애완동물로서의 삶을 이미 오래전 떠나왔다. 고양이는 이따금 이곳저곳 위로 뛰어다니며 소리 없이 부엌을 한 바퀴 돌면서 두루 살펴본다. 고양이의 녹색 마름모꼴 눈이 장식장의 도자기와 전기스토브의 흰색 에나멜 위를 지나고, 벽의 찬장과 선반, 개수대 위 수도꼭지, 나무의자들, 의자 하나가 뒤집혀 있는 테이블, 매달린 인간의 육신을 지나간다. 인간의 몸은 목재 천장의 햄 걸이용 고리 하나에 긴 전깃줄로 매달려 있다. 머리가 앞으로 기이하게 늘어졌는데, 턱 아래 살덩이가 받쳐주어 옆으로 기울지 않는다. 길고양이의 관심거리는 아니다. 고양이는 안에 우유가 조금 남아 있는 스토브 위 냄비에만 관심이 있다.” (pp.301~302)


  소설 《펠리시아의 여정》은 독자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수작들을 피하지 못하는 순진하기 그지 없는 펠리시아를 그려내고 있다. 그 반대편에 힐디치 씨가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어쩌면 힐디치 씨 또한 펠리시아만큼이나 순진한 인간일 수 있다. 펠리시아가 순진한 선이라면 힐디치 씨는 순수한 악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반대편에는 꾸준히 영악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점점 거대해지는 현대 사회가 공동으로 놓여 있을 따름이다.



윌리엄 트레버 William Trevor / 박찬원 역 / 펠리시아의 여정 (Felicia’s Joruney) / 문학동네 / 338쪽 / 2021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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