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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9시간전

필립 K. 딕 《높은 성의 사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높은 성의 사내'가 되고마는 우리...

  “이제 어느 요양원의 환자 신세라는 늙은 히틀러는 매독으로 온 몸이 마비되고 노망까지 든 채 여생을 보내고 있다. 뇌까지 번진 매독은 그가 비엔나에서 길고 검은 코트에 더러운 속옷을 입고 싸구려 간이숙소를 전전하며 부랑자로 살던 시절에 얻은 것이다... 끔찍한 건 지금 독일제국이 바로 그자의 머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그의 두뇌는 처음에는 정당을, 이어서 나라를, 다음에는 세계의 절반을 집어삼켰다...” (p.66)


  《높은 성의 사내》는 대체역사소설이다.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역사는 히틀러가 세계대전에서 승리하였다는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다. 히틀러는 자살을 하지도 않았다. 독일은 거대한 제국이 되었고, 세계대전 당시에 앞서 있던 로켓 기술을 극대화시켜 우주로 나아가고 있다. 독일 제국은 유대인 말살에 이어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들을 더욱 철저하게 말살하였다. 그들의 관점은 그저 우주적일 뿐이다.


  “... 그들의 관점은 우주적이다. 여기 한 사람, 저기 한 아이, 이런 식이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을 가졌다. 인종, 땅, 사람들, 국가, 혈통, 명예. 명예로운 인간이 아니라 명예 자체를 중시한다. 관념이 현실이 되고, 현실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선善은 존재하나 좋은 사람은 없다. 공간과 시간을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지금’ ‘이곳’을 관통해 거대하고 깊은 어둠 속 불변의 존재들을 본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에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끝내 삶은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p.75)


  독일 제국과 함께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또 다른 나라는 일본이다. (일찌감치 손을 들어버린 이탈리아는 승자가 될 수 없었다) 독일과 일본은 이제 세계를 양분하여 지배하고 있다. 미국은 현재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져 독일과 일본 양국에 의하여 분할 통치되고 있다. 그리고 소설은 미국 대륙의 서쪽, 지금은 일본에 의한 지배를 받고 있는 태평양연안 지역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그 책을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여기며 질문을 던집니다. 하지만 주역은 실제로 살아 있습니다. 기독교의 성경과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책들이 실제로 살아 있습니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영혼이 책에 생기를 불어 넣습니다...” (pp.122~123)


  주요 등장인물은 아메리칸 예술 공예품을 취급하는 상점의 주인인 미국인 로버트 칠던, 그리고 태평양연안연방 일본 무역대표부의 고위직 관료인 일본인 다고미 노부스케, 스웨덴인 기업가로 위장한 독일 보안국 요원인 바이네스, 공장 노동자이자 금속 세공 예술가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 프랭크 프링크 등이다. 흥미로운 것은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이들이 주역을 애용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괘를 뽑고 주역에 따른 풀이를 통해 매우 일상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예측한다.


  “이게 바로 일본인들이 지배하는 방식이야. 노골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미묘하고 정교하게, 그리고 세월이 가도 변함없이 교활한 방식으로.” (p.310)


  그런가 하면 호손 아벤젠이 쓴 (나중에 알게 되지만 이 소설가 또한 자신의 소설을 쓰는 데 주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라는 제목을 지닌 소설은 이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대체역사소설에 등장하는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라는 소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역사에 근접하는 내용을 다룬다. 그렇게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는 《높은 성의 사내》라는 대체역사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체역사소설이 되고 만다. 


  “... 과거는 미래에 무릎을 꿇었다... 어느 쪽이냐? 다고미는 은 장신구에게 물었다. 어둡고 죽어 있는 음인가, 밝고 살아 있는 양인가? 은 장신구는 그의 손바닥에서 춤추며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눈을 가늘게 뜬 그에게 보이는 건 그저 불꽃이 어른거리는 모습뿐이었다... 음의 몸체와 양의 정신. 금속과 불꽃의 일체화. 내면과 외면. 내 손바닥에 작은 우주가 있다.” (p.393)


  소설의 제목인 ‘높은 성의 사내’는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를 쓴 호손 아벤젠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소설에 등장하는)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역사를 다룬 유일한 인물은 바로 ‘높은 성의 사내’ 호손 아벤젠일 뿐이다. 그리고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실제 역사를 살고 있는 것은 바로 소설 바깥의 우리들인데, 그렇게 우리들은 우리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높은 성의 사내’가 되고 만다. 그러니까 주역의 점괘처럼...



필립 K. 딕 Philip K. Dick / 남명성 역 / 높은 성의 사내 (The Man In The High Castle) / 폴라북스 / 478쪽 / 2011 (1962,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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