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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10시간전

앨런 홀링허스트 《수영장 도서관》

절대로 들뜨지 않고 현실과 공상을 오가는 문장의 궤적...

  “지하철 막차로 귀가했다. 맞은편 좌석에는 런던교통국에서 일하는 정비사 두 명이 앉아 있었는데, 한 사람은 쉰살가량의 체구가 작고 뇌쇠해 보이는 남자였고, 또 한 사람은 꽤나 잘생긴 흑인으로 서른다섯살가량 되어 보였다. 각자의 발치에 두툼한 캔버스백이 하나씩 놓여 있었고, 지하철 안이 텁텁하고 더운 탓인지 그들의 조끼 위 작업복 단추는 풀린 채였다... 흑인 사내는 느슨하게 오므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무척 초연하고 침착했는데, 아주 유능하지만 스스로는 그것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나는 그에게 존경 이상의 느낌, 어떤 다정함마저 느꼈다. 그가 귀가해서 장화를 벗고 커튼 주위로 동이 터오며 바깥 거리에서 부산한 소리가 점점 커지는 동안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잠자리에 드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가 손을 뒤집자 옅은 금빛 결혼반지가 보였다.” (pp.9~10)


  소설의 첫 번째 문장에서 이미 사로잡혔다. 지하철 막차를 타고 귀가하는 주인공이 같은 지하철에 타고 있는 사람을 보며 눈으로 확인하는 것의 묘사와 그 확인과 동시에 자신에게 떠오른 상상을 하나의 문장에 품고 있었는데, 들뜨지 않고 차분한 상태로 현실과 공상을 오가는 궤적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런 문장이야말로 집중하고 있지만 매몰되지는 않는 관찰의 결과물이라고 생각 되었다.


  “나는 거의 매일 거기서 수영을 했고, 때로는 체육관에서 매트운동을 하거나 체력단련실에서 좀 간단한 운동을 한 뒤에 수영을 하기도 했다. 수영은 마음을 비워주면서도 만족감을 주는 특이한 운동이었다. 나는 자유형과 평형을 번갈아 하고 열 번에 한번은 접영을 섞어 빠르게 오갔다. 나는 복사기처럼 자동적으로 이제 일과가 된 오십번의 왕복을 헤아렸다. 하지만 동시에 한눈을 팔기도 했다. 생각에 잠기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삼십분 정도가―순수하게 육체적 운동에만 몰두하는 시간이―지나갔다. 오늘 저녁 나는 차고 우울한 물을 가르며 왕복할 때마다 아서와 진짜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거나 상상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 동안 아서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pp.29~30)


  이러한 문장의 궤적을 한참 따라가다 보면 드디어 주인공이 집에 두고 온 어린 어린 흑인 소년이 등장한다. 앨런 홀링허스트는 유명한 동성애 작가이고, 그의 소설은 동성의 사랑을 기본값으로 삼아 진행된다. 하지만 그저 단순히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사랑을 그려내는 것에서 멈추지는 않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나이든 찰스 낸트위치 경의 존재는 그래서 중요하다. 느닷없이 등장한 것 같지만 조금씩 중요한 위치로 올라선다.


  “나는 침대에 누워 찰스 낸트위치의 삶이 가진 여러 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흑인의 미를 발견하는 학생, 대학생 시절의 치기 어린 토끼사냥, 술마시고 놀기, 누비산맥에서 공상에 빠진 문관文官, 전화 통화의 절차와 의례를 잊어버린 노인.” (p.226)


  낸트위치 경은 우연히 만난 윌리엄의 성이 벡위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몇 차례 더 만남을 가진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자신의 일기장을 비롯한 자료를 건네며 자서전을 써줄 것을 부탁한다. 잘 나가는 가문의 후손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지내는 윌리엄은 그 일을 맡을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낸트위치 경이 자신처럼 동성에게 애정을 느끼는 인물이라는 점은 확인하였어도 그렇다.


  “수영장 사서가 되다니 기쁘구나. 수영장 도서관에는 어떤 종류의 책이 있는지 얘기해줘야 한다... 나는 수영을 잘했을 뿐 아니라 수영장에 흥미가 많았기 때문에 그것은 이상적인 임무였다. 학교 건물에서 밤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4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던 작은 실외수영장과 천창이 있는 흰색 탈의실은 내 최초의 방종을 목격한 곳이다...” (p.245)


  (책의 제목이 《수영장 도서관》인 것은 주인공인 윌리엄이 최초에 자신의 동성애적인 성향을 알아채고 또 즐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사립학교 시절의 수영장인 것과 연관이 있다. 그리고 그 사립학교에서는 수영장을 비롯한 각각의 공간을 맡고 있는 학생을 사서라고 불렀다. 이 사실을 들은 나의 아버지는 수영장과 사서라는 두 단어를 연관시켜 ‘수영장 도서관’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다. 어쩌면 ‘수영장 도서관’은 일반인들의 동성애자들을 향한 일종의 몰이해를 은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서 동성애자들은 시작되고 또 행복하였다.)


  “그런 뒤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한겨울이었다―뭔가가 내 안에서 굳어졌다. 나는 성에 낀 유리창 너머 초록빛 숲을 상상 속에서 보았다.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 세계, 그 조급함과 무관심의 잔인한 세계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새사람이 되어야 했다. 나를 겁박하고 모멸한, 자신들이 준 상처의 흔적을 비난의 눈으로 훑어보는 자들과 다시 함께 지내야 했다. 나와 비슷한 다른 사람들, 나보다 방어능력이 훨씬 적은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만 했다. 죽음의 성찰을 포기하고 나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어야 했다. 심지어 조금은 증오하기조차 해야 했다.” (pp.443~444)


  그리고 결국 나는 낸트위치 경과 자신의 할아버지인 벡위스 경 사이의 악연을 알아채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미 오래전의 시간 속에서 흘러 지나간 일이었지만 그것이 흐르고 또 흘러 지금의 윌리엄에게 이르게 된 것이다. 오래 전 낸트위치 경의 마음 속에 새겨졌던 증오의 감정이 자신과 같은 처지인 벡위스 경의 손자에게 이르러 폭발하게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것은 그러니까 길고 긴 시간동안 숙성된 아이러니의 결정체 같다. 그럼에도 소설은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절대 들뜨지 않는다.


  “한낮의 코리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무척 조용했다. 거기 있던 몇몇 사람들은 서로를 경쟁자로서가 아니라 사려 깊은 관심을 갖고 바라보았다. 다양한 다른 일상들이 동등하게 겹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노인이 몇명 있었는데 한둘은 찰스만큼 늙어 보였고, 의심할 바 없이 다들 특이하지만 또 신기하게 비교도 가능한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샤워실에 들어가자 내 마음에 드는 하늘색 수영복을 입고 햇볕에 그을린 피부를 가진 젊은 애가 보였다.” (p.492)



앨런 홀링허스트 Alen Hollinghurst / 전승희 역 / 수영장 도서관 (The Swimming-Fool Library) / 창비 / 503쪽 / 2021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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