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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9시간전

마쓰모토 세이초 《모래그릇》

마쓰모토 세이초 《모래그릇》

  소설은 도쿄의 한 칵테일 바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반백의 사내와 서른 살 정도의 사내가 바로 들어오지만 원래 바를 드나드는 단골 손님들은 아니다. 바의 종업원이 주문한 음료와 함께 자리에 앉으려 했지만 두 사람 중 젊은 쪽이 이 동석을 거절했다. 두 사람이 앉은 자리는 화장실로 가는 길목이어서 손님과 종업원들이 지나갔지만 젊은 쪽의 인상착의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했다. 반백의 사내는 다음날 새벽 얼굴이 짓이겨진 시체로 발견된다.


  “생각해보면 범인은 미키 겐이치를 가마타에서 살해하고, 거기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 도망쳐 피로 물든 의복을 벗었을 것이다. 여자는 범인의 피로 물든 옷을 잘게 잘라 5월 19일 열차에서 날려보낸 것이다. 범행이 5월 11일 한밤중이었고, 열차 창밖으로 옷을 버린 것이 19일이므로 약 일주일의 공백이 있다. 그사이 피로 물든 범인의 의복은 여자가 맡아두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1권, p.275)


  죽은 이의 동선이 알려지고 그가 사용한 도호쿠 지역의 사투리 그리고 가메다, 라는 표현이 포착되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타는 듯하다. 사건에 투입된 이마니시 형사는 열의를 가지고 단서들을 따라간다. 가메다, 라는 것이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지역명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눈을 돌리고, 직접 그 지역까지 찾아가는 것도 바로 이마니시 형사이다. 하지만 그 방문에서 명확한 단서를 찾는 것에는 실패한다. 다만 역에서 ‘누보 그룹’이라는 젊은 예술가들과 마주쳤을 뿐이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연출가 사사무라 이치로, 극작가 다케베 도요이치로, 평론가 세키가와 시게오, 작곡가 와가 에이료, 건축가 요도가와 류타까지 다섯 명이다...” (1권, p.104)


  소설은 바로 이 부분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독자들을 끌고 나아간다. 도쿄의 바에서 죽은 반백의 사내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젊은 예술가 그룹의 일원에 대한 이야기가 당당히 소설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는 것이다. 이후부터는 도대체 시체로 발견된 반백의 사내와 이 예술가 그룹은 어떻게 연결이 될 것인가, 사건 해결의 열쇠는 이들 그룹의 일원들 중 누가 가지고 있는 것인가, 를 열띠게 생각하며 독서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 이마니시의 머릿속에서 갖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그는 도호쿠와는 정반대에 있는 시마네 현 니타 군 니타초 가메다케를 떠올렸다. 도호쿠 사투리와 아주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는 지방. 올해 더위가 한층 기승을 부릴 때 이마니시가 긴 기차 여행을 다녀온 지역이다. 하지만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범죄의 근원이라고 여길 만한 단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2권, pp.20~21)


  소설 《모래그릇》은 1960년 5월 17일에서 1961년 4월 20일까지 요미우리 석간신문에 연재된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가인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이다. 사건이 발생하고, 여러 가지 단서들이 놓여지고, 그 단서들을 형사가 따라가지만 한참 그렇게 가다보면 오히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 라는 설정인데 그것이 독자들이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범인이 잘도 숨겨지고 있다.


  “그건 그렇고, 미키 겐이치는 이세에서 상경해 가마타의 싸구려 술집에서 범인과 만났으나 그사이 시간상으로는 그다지 간격이 크지는 않았다. 미키 겐이치는 5월 9일에 이세 시에 있는 후타미 여관에서 묵었다. 그는 9일 밤 영화를 보고 10일 낮에 다시 영화관에 갔다가 그날 밤 출발했다. 그는 여관에서 나고야발 22시 20분 열차를 타기 위해 갈아탈 긴테쓰 전철을 물어보았다. 만약 미키 겐이치가 이 기차를 이용했다면 11일 새벽 네시 오십구분에 도쿄 역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의 시체가 가마타 조차장에서 발견된 것은 12일 새벽 세시 조금 넘어서다. 그러나 부검 결과 그의 사망 추정 시각은 11일 밤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였다. 그렇다면 11일 아침 도쿄에 도착한 미키 겐이치는 바로 그날 밤 살해된 셈이다. 도쿄에 도착해서 이곳 공기를 열아홉 시간밖에 마시지 못한 셈이 된다.” (2권, p.224)


  겉으로는 새롭게 도래한 시대를 대표하는 혹은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갈 인물로 여겨지는 인물이 자신과 연결된 과거를 잘라내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어쩌면 60년대의 일본 사회를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945년의 패전으로부터 고작 십오 년이 흘렀을 뿐인 1960년의 일본은 아직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 특히나 살인자가 그렇다. 아직 전후 세대가 등장하기도 전의 이야기이다.



마쓰모토 세이초 / 이병진 역 / 모래그릇 / 문학동네 / 1권 335쪽, 2권 367쪽 / 2013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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