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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2. 2024

이소영 《별것 아닌 선의》

위선보다는 위악이라는 야만의 시대를 향하고 있는 선한 충동들...

*2021년 5월 22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오년 전쯤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젊은 시절 위선은 위악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모든 솔직하지 못함이 싫었던, 본능과 욕망에 쉽게도 굴복하는 나를 합리화하고 싶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위악보다는 위선이 낫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의 생각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입장이 강화되고 있다고 느낀다.


  “... 수많은 전문가들이 예리하게 분석한 정치·경제적 현안들과 ’세상을 바꾸는 방안‘에 나의 서툰 논평을 한 줄 더 얹는 대신, 그 세상에서 떼어놓는 작은 발걸음들에 시선을 두면 어떨까 생각했다. 핵문제가 해결되고 적폐청산을 하고 나쁜 자들을 감옥으로 보내도 여전히 견고하게 지속될, 제도를 몸통으로 하고 자본을 심장으로 한 세계. 그 안에서 힘겨워할 우리가 서로에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찰나들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p.22)


  월초 한겨레신문에 실린 사회학자 조형근의 칼럼에 크게 공감했다. 그는 칼럼의 말미에 “... 위선으로 입은 상처를 솔직한 악덕으로 치유할 수는 없다. 역설적이지만 위선이야말로 선을 닮고 싶은 우리의 또 다른 본성을 증거한다... 위선마저 사라진 세상은 야만이다. 냉소하기보다는 위선의 모순 속으로 걸어가야 할 까닭이다...” 라고 말했다. 과거와는 또다른 층위에서 야만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를 향한 일종의 경고로 읽혔다.


  『영화 <체리 향기>(압바스 키아로스타미, 1997)에서 한 노인이 주인공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생을 그만두고 싶었던 수십 년 전의 이른 새벽, 참담한 마음으로 나무에 올라 밧줄을 매달던 중 손에 뭔가 만져졌다고 한다. “체리였죠. 탐스럽게 익은 체리였어요. 난 그걸 하나 따 먹었죠. 과즙이 가득했어요. 두 개 세 개를 먹었어요. 그때 산등성이에 태양이 떠올랐지요. 장엄한 광경이었죠. 그러더니 갑자기 학교 가는 아이들 소리가 들렸어요. 그 애들은 가다 말고 날 쳐다보더니 나무를 흔들어달라고 했어요. 체리가 떨어지자 애들이 주워 먹었고요. 난 행복감을 느꼈어요. 그러곤 체리를 주워 집으로 향했지요.”』 (p.62)


  이 칼럼에 대해 박권일은 (유려한 글이기도 하지만) 진영 논리를 자극하여 화제가 되었다고 짐작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위선의 이중성은 긍정성과 부정성을 모두 담는다. 긍정성은 조형근 선생 표현처럼 그것이 선을 선망하는 우리의 본성을 증거한다는 점이다. 부정성은 내가 말한 것처럼 그것이 악을 알리바이 삼아 선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내 입장은 여전히 후자다. 그러나 전자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위선은 어떤 경우에도 악보다 나은 것이다...” 


  『이 글을 쓰던 중에도 또 한 건의 아동학대에 대해 들었다. 극악한 부모라는 자들에게 더 무거운 형이 언도되길 바라는 청원에 목소리를 얹기보다는 가정폭력을 겪은 아이가 “그러니까 집안 내력이 중요한 거야.”, “아무튼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사람과 사귀어야 해”라는 식의, 선량한 이웃이 무심코 던진 말과 시선에 상처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손을 보태고 싶었다. 그게 더 옳아서가 아니라 단지 내겐 그게 더 절실하게 여겨져서다. 그 과정에서 분노가 쉽사리 나의 힘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연민 없는 분노가 넘실거리고 예의 잃은 정의감이 너무 자주 목도되는 지금 이곳에서.』 (P.92)


  위선의 부정성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착한 척 하지 말고 마음껏 너의 착하지 않은 본성을 드러내라,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욕망이 없는 척 하지 말고 솔직하게 그 욕망을 채워라, 라고 권해서도 안 된다. 대신 착한 척 하지 말고 정말 착해져라, 라고 부추기는 게 낫다. 욕망이 없는 척 하지 말고 정말 너의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 라고 격려하는 것도 좋겠다. 


  “나는 안다. 끝이라 생각해온 어느 지점은 끝이 아니다. 거기에 빛나는 것들이 새로이 채워 넣어질 것이다. 두근거리며 기다릴 무엇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을 것만 같은 시기에도 우린 저마다 아름다운 시절을 하나 더 통과하는 중일 수 있다. 어쩌면 오늘도 그럴지 모른다.” (P.241)


  산문집 제목이 《별것 아닌 선의》인데, 이즈음 ’별것 아닌 선의‘들이 위선으로 치부되는 사회가 도래하는 것 아닐까 의기소침한 참이었다. 책의 부제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가장 작은 방법‘인데, 사소하지만 쉽게 가능할 수 있는 어떤 방법들이 위선이라는 손가락질에 가로막혀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참이기도 하였다. 책을 읽고 나서 조금 위안이 되었고 두려움도 살짝 줄어들었다. 뉴스에서 뭐라 떠들든, 다들 알아서 잘들 하고 있다, 여기기로 했다.



이소영 / 별것 아닌 선의 / 어크로스 / 279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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