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위는 다르지만 그 궤적은 비슷하였던 세 작가의 문학적 행보를 따라...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이 세 사람을 한데 묶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고 수긍하는 사람보다는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을 것임을 나는 안다... 사실 내가 이 책에서 세 사람을 하나로 묶는다고 해서 그들의 정신적 수준이 동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세 이름은 세 단계, 말하자면 같은 장르 안에서 서로 다른 세 층위, 점차 높아지는 세 단계를 상징한다. 다시 말하면 세 사람은 동일한 수준의 형식을 함께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창조기능, 즉 자기묘사라는 형식의 점층적인 세 단계를 대표한다...”
다른 작품과 비교한다면 그 재미가 조금 덜하다.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라는 걸출한 인물에 대한 인생역정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글이라기 보다는 소설가로서 문학가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기 투영이라는 방식, 그 방식의 어떠한 지점은 공통의 분모를 가지지만 또다른 지점에서는 크게 다른 층위를 지니고 있다는 전제 하에 이들 세 사람을 따로 또 같이 버무리고 있는 글인 탓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먼저, 카사노바...
“그는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했다. 이것이 그의 문학적 업적의 전부다. 하지만 그 얼마나 대단한 인생인가! 다섯 편의 소설, 스무 편의 희극, 여러 편의 단편과 에피소드, 최고로 멋진 무용담과 일화들이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영글어 한 인간의 인생을 채우고 흘러넘친다...”
츠바이크가 말하는 자전적 혹은 자기성찰적 글쓰기의 세 단계에 따라서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카사노바이다. 돈 후앙과 더불어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카사노바일 (이런!!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그의 이름을 거치지 않으면 문장을 성립시키지 못하게 될 정도의 유명세라니...) 바로 그 카사노바가 그의 발자취를 문학적으로도 남겼다는 사실, 그리고 그 문학적 자취가 후세에 남긴 가치에 대해서 츠바이크는 이야기한다.
“... 좀더 높은 의미에서 보면 카사노바의 회고록은 소설이라기보다는 통계적인 보고이고, 문학이라기 보다는 현장체험의 기록이고, 육체의 편력을 담은 오디세이고, 영원한 헬레네를 찾아 헤매는 무한한 욕정의 사나이가 펼치는 일리아드다. 카사노바가 남긴 회고록의 가치는 질이 아니라 양에 있다. 회고의 내용이 유일하고 독특하기 때문이 아니라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정신적 중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양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사기꾼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그가 어떤 천재성이라기 보다는 카사노바 노릇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유일하게 가질 수 있었던, 좋았던 시절에 대한 되새기기로서의 집필 활동이 어떻게 해서 우리들에게 유의미한 무엇이 되었는가를 츠바이크는 스스로도 약간 흥분한 채 역설한다. 그의 거친 행적은 거칠었던 행적대로, 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유산대로 나누어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 역시 츠바이크답다.
“... 그는 세상의 어떤 일에도 도덕적 혹은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고, 그 덕에 그의 회고록에서는 세계가 자연스러운 균형 상태 그대로 훌륭하게 보존됐다. 카사노바의 회고록은 지적인 측면에서 보면 인생의 흥미 있는 여러 풍경들을 섭렵한 한 똑똑한 여행자의 메모 정도에 지나지 않아 철학적 사색거리는 제공하지 못하지만, 18세기로의 역사적 여행 안내서인 동시에 재미있는 스캔들의 연대기로서 한 시대의 일상을 완벽한 단면도로 재현해냈다. 그 어느 누구의 글보다도 카사노바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18세기의 일상과 문화, 무도회, 극장, 카페, 축제, 음식점, 도박장, 사창가, 사냥, 수도원, 요새 등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스탕달...
“... 문학의 열렬한 수호자인 스탕달은 사람, 직업, 관직을 비롯해 그 어떤 것에도 완전히 자기 자신을 바치지 않았다. 물론 장편 내지 단편 소설, 심리학적 작품 등 책을 쓸 때는 오로지 그것에만 전념해 글을 썼지만, 이런 그의 정열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었다...”
앙리 베일이라는 이름대신 뭔가 있어 보이는 필명 스탕달을 사용하였고 그렇게 기억되기를 바랐으며 그의 뜻대로 그렇게 기억이 되고 있는 작가 스탕달... 하지만 그의 글들은 실제로는 젊은 시절의 자기 자신을 뒤늦게 투사하였던, 그 결과물들이라는 사실의 재탕에 불과하였음이라는 아쉬움 속에서도 스탕달의 이름값이 깎이지는 않는다. 당대가 아니라 몇십 년 후에 자기 자신의 글이 각광을 받을 것임을 스스로 알았고, 또 그렇게 되었다는 예언자적 사실을 어떻게 안 받아들일 수 있으리...
“... 스탕달의 문학은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만들어가기에는 너무 늦게 시작되어 서서히 진행되는 죽음을 완성하고 그것을 예술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었을 뿐이다. 스탕달은 마흔세 살에 자신의 첫 번째 소설인 <적과 흑>(이보다 앞선 <아르망스>는 진정한 의미의 처녀작이 아니다)을 쓰기 시작했고, 쉰 살에 <루시앙 뢰방>, 쉰네 살에 세 번째 소설인 <파름의 수도원>을 쓰기 시작했다... 세 작품은 이제 나이가 든 앙리 베일에게서 소멸되기는커녕 오히려 재생되려고 하는 젊은 시절 그의 영혼을 기록한 역사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톨스토이...
“... 톨스토이의 외모 중 유일하게 그 눈 속에서 천재성이 보인다.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지닌 아름다움이 대리석 아치와 같은 이마에서 나타나듯이, 눈빛의 인간으로서 톨스토이가 발하는 모든 빛의 힘은 천 겹 눈 속에 축적됐다가 그 눈을 통해 나타난다...”
생각과는 달리 작은 키에 그다지 귀족적이지 않았던 톨스토이, 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그를 대면하는 모든 이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는 톨스토이...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을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생각하였던, 자신의 태생적 그리고 계급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인류애라는 기치를 갖고 있었던 톨스토이의 삶에 대하여 짧고 굵게 기록하고 있다.
“... 그는 우리 모두와 같이 허약한 찰흙으로 빚어지고 똑같이 현세적 약점을 지닌 인간이었으나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녔고, 인간들로 인해 더 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는 동시대인들을 비롯한 다른 인간들보다 더 숭고한 인간이 아니라 더 인간적인 사람이었고, 그들보다 더 윤리적이며 더 명철하고 더 의식이 깨어 있고 더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슈테판 츠바이크 / 나누리 역 / 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Drei Dichter ihres Lebens Casanova, Stendhal. Tolstoi) / 필맥 / 336쪽 / 2005 (1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