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T》

함께 실린 티셔츠 사진과 번갈아 살피는 사연의 작은 재미...

by 우주에부는바람

신입생이던 88년은 아니었던 것 같고, 아마 1989년으로 기억된다. 당시 몸담고 있던 문학 동아리에서는 매년 대동제를 즈음하여 단체 티를 맞추었다. 그해의 티셔츠에는 옷의 왼쪽 가슴에 ‘해방글샘’이라는 네 글자가 로고처럼 박혀 있었다. 옷은 하늘색에 글자는 붉은색(흰색이던가)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로고가 엄청 눈에 잘 띄었다. 참치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기업의 로고와 글씨체가 같아서 더 그랬다.


『티셔츠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모인 것’이다. 값싸고 재미있는 티셔츠가 눈에 띄면 이내 사게 된다. 여기저기에서 홍보용 티셔츠도 받고, 마라톤 대회에 나가면 완주 기념 티셔츠를 준다. 여행 가면 갈아입을 옷으로 그 지역 티셔츠를 사고······. 이러다 보니 어느새 잔뜩 늘어나서 서랍에 못 다 넣고 상자에 담아서 쌓아 놓는다. 절대로 어느 날 “좋아, 이제부터 티셔츠 수집을 하자” 하고 작심한 뒤 모은 게 아니다.』 (p.6)


우리는 그 옷을 입고 가(두)투(쟁)에 나가기도 했다. 막상 전경들과 대치하며 돌을 던지거나 화염병을 던질 때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시위 현장에 나갈 때 시위가 끝나고 돌아올 때가 문제였다. 아무 때고 검문을 해대는 전경들 사이를 ‘해방’이라는 붉은 글씨가(흰 글씨인가) 선명한 옷을 입고 통과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은근한 손동작으로 가슴을 가린 채 통과하고는 했는데, 화사한 파스텔 톤의 하늘색 티셔츠인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KEEP CALM’ 티셔츠는 몇 년 전 스페인 출산사에서 만든 것이다.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무라카미를 읽자.(KEEP CALM AND READ MURAKAMI)” 좋다. 아주 멋진 카피다. “KEEP CALM AND CARRY ON(평정을 지키며 일상생활을 계속하자)‘은 원래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되려 할 때 영국 정보부가 민심을 안정시키고 패닉 발생을 막기 위해 만든 포스터 속 문구다. 최근 재조명을 받더니 어째선지 널리 인기를 얻어 곳곳에서 사용하고 있다... 내 티셔츠도 그렇게 생긴 것이다. 고양이 그림이 너무 귀엽지만 아무래도 본인이 입을 수는 없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세상이 술렁거러고 어수선할 때 차분하게 앉아 독서에 정진하라는 뜻이 아주 좋다. 부디 꼭 그래 주십시오.』 (pp.41~42)


《무라카미 T》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간직하고 있는 엄청난 숫자의 티셔츠, 그 티셔츠들 중 일부의 사진과 함께 얽힌 사연을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티셔츠가 많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야기를 들은 잡지사의 편집자가 제안했고 그것을 받아들여 일 년 여 동안 연재한 내용이라고 한다. 덧붙이자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티셔츠 이외에 LP판, 책, 잡지 스크랩 그리고 (아주 짧아져 연필깎이에도 들어가지 않는) 몽당연필 등을 쟁여놓은 상태이다.


“그리고 의외로 재미있는 곳이 호놀룰루로, 전문 중고 가게는 적지만 ’굿윌‘ 같은 자선매장에서 깜짝 놀랄 만큼 진귀한 것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한 장에 1달러로. 예를 들자면······ 얘기가 길어지니 다음에 또.” (p.53)


글이 아주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진으로 함께 실린 티셔츠와 번갈아 살피는 작은 재미 정도는 있다. 세상은 넓고 티셔츠는 많구나,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사연도 제각각이어서 마우이 섬 시골 경매장에서 1달러를 주고 구매한 <“TONY” TAKITANI>라는 글귀가 새겨진 티셔츠는 무라카미 하루키로 하여금 토니 타키타니는 어떤 사람이지, 라는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고, 이후 단편소설로 만들어졌고 영화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초록색은 까마귀(라고 생각함). 까마귀한테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심술궂은 일을 당했다. 아침에 달리다 보면 종종 까마귀가 공격을 해서. 특히 아오야마 묘지를 빠져나가는 도로에서는 아슬아슬하게 저공비행 하며 위협하기도 하고, 머리를 발톱으로 할퀴기도 했다. 까마귀한테 뭐 나쁜 짓을 한 기억도 없고 나쁜 짓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도 없는데, 어째서 이렇게 못된 짓을 하는지 어이없기도 했다. 하지만 뭐 까마귀한테는 까마귀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아니면 어떤 문학평론가가 윤회해서 흉포한 까마귀로 태어난 건지도 모르고······는 물론 농담입니다.” (p.131)


그런가하면 하루키는 자신의 출간 기념으로 함께 제작된 일종의 굿즈인 티셔츠도 꽤 여러 장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좀처럼 그 옷을 입고 외출을 하기는 어렵다고 하는데, 이해할만 하다. 예전에 그 89년도의 동아리 단체 티셔츠를 처음 입을 때의 어색함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나오면 일주일이나 보름이 지나야 귀가하는 생활 패턴 탓에 바로 그 티셔츠 한 장으로 며칠을 버티기 일쑤였다. 그때는 그것이 가능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 권남희 역 / 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 비채 / 190쪽 / 202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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