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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2. 2024

한정현 《줄리아나 도쿄》

불투명한 일본 문화의 잔상들이 소환되는 모호한 연결 통로들...

  90학번 후배가 있다. 그를 몰랐다면 아래의 설정을 그저 소설적 상상력의 일환이라 치부했을 것이다. 후배는 글을 쓰고 싶어 했고 (발표 여부와 상관없이) 글을 썼다. 마지막으로 나를 찾아왔을 때 후배는 말했다, 형 저는 글을 쓰고 있으므로 작가예요. 시간이 흘러 그가 난독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다른 후배로부터 들었다. 어느 날 꿈에 후배가 나타났다. 나는 몇몇 후배를 거치는 수소문 끝에 후배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의사는 희귀한 경우이지만 의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했다. 인간의 뇌는 모국어와 외국어를 각기 다른 영역에서 관장한다. 한주는 의식이 돌아오며 모국어를 담당하는 부분이 열리지 않았다. 다만 남겨진 건 일본어였다...” (p.25)


  밤의 꿈을 이야기하며 걱정을 드러냈다. 내가 앞서 난독증인 후배의 상황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참에 후배가 먼저 내게 나아진 상황이 있다고 알려왔다. 자신이 어떤 글도 읽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여전하지만 얼마전 영어로 된 텍스트는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영어로 된 뉴스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찾아본다고 했다. 다행히 후배의 전공은 영문학이었다. 다행스럽지 못한 것은 후배는 집밖 출입을 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자, 내 이름은 유키노, 태어난 곳은 미타 공업지구, 어린 시절 살았던 곳은 오타루, 그곳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은 어머니, 오타루를 떠나 살았던 곳은 도쿄, 그곳 도쿄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은 한주, 한주가 태어난 곳은 서울, 한주가 죽었던 장소는 부산 호텔의 어느 욕조 안. 특이사항은... 특이사항은, 어머니와 한주, 모두 내가 속였고 내가 떠나야만 했다는 것이다.” (p.138)


  후배와 전화 통화를 한 것은 십여 년 전이다. 선후배를 통해 그 후배가 서울을 떠나 천안(이던가 여하튼 중부지방)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삼년 전쯤 후배와 통화를 했다는 선배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전과 비교하여 나아진 것 같다는, 아주 희미한 신상을 전달받는 데에 그쳤지만, 그래도 누나랑 연결이 되어 대화를 나눴다니 다행이에요, 라며 안도하였다.


  “한주는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석사논문에 썼던 여성 노동자들, 그 시절 여성들의 이야기 말이다. 남자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자신과 함께해줄 남자를 기다리고, 그들과 가정을 꾸리기만을 고대하며 고단한 환경을 참아내는 것으로 귀결되던 여성들의 이야기. 남자에게 맞으면 그것 역시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며 마치 죗값을 치르듯이 자신을 파괴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한주는 자신이 그 여성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그들은 자신만의 가족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이 원했던 가족은 그저 서로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고 감싸주는, 좋은 일을 함께 나누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p.107)


  모국어를 잃고 일본어만 겨우 사용할 수 있는 소설 속 한주를 읽으며 곧바로 후배를 떠올리고 말았다. (후배는 한국어로 말할 수는 있다. 한국어를 읽을 수 없을 뿐이다.) 소설 속 한주의 암울한 상황은 십여 년 전 내가 꾸었던 어두운 꿈만 같아서 다시금 후배에게 연락을 취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주는 한국의 남자 친구로부터 연속되는 구타를 당하였고, 어느 날 인간의 초점이 어그러졌다. 한국어를 잃고 일본으로 건너 왔다. 


  “경찰의 검열로 줄리아나 도쿄의 단상은 그 환상적 성격을 잃어버린다. 작업복을 벗고 과감한 무대 의상을 입음으로써 전혀 다른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었던 여성들은 복장 단속과 함께 다시 현실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스스로에 대한 검열로 이어졌으리라. 전공투의 검열은 얼핏 자기반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김추는 그 정체성을 닫아두고 무리하게 외부로 옮겨놓으려고 했다는 점이 기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남성 엘리트의 자기반성의 한계는 아닐까. 김추는 두 공간의 좌절이 그런 외부적 힘에 대한 대응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pp.224~225)


  한주는 일본에서 한 노인의 선의를 거쳐 서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서점에서 유키노를 만나고 유키노와 함께 기거하게 된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유키노는 게이인데 잠시 사귀었던 한국인 한수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해왔다. 한주는 유키노를 위해 애를 썼지만 한수를 막지 못한다. 유키노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 그래서 스스로 몸을 옮기는 것으로 여러 사람을 구하고자 한다.


  “나는 오빠의 방 문을 여는 걸 항상 두려워했다. 커튼을 닫고 불도 켜지 않는 오빠가 있는 방.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건 방문을 열었을 때 흘러나오던 모리타 도지의 가을날 공기 같은 목소리. 모리타 도지는 전공투였던 친구가 목숨을 잃자 그때부터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 번도 무대 위에서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고 결코 웃은 적이 없는 사람.” (p.277)


  소설에는 캬바쿠라, 줄리아나 도쿄, 전공투, 모리타 도지 등등 다양한 일본 문화의 잔상이 등장한다. 이제는 희미한 60년대와 80년대와 90년대의 일본이 한국과 연결되고 있다. (여성 노동자, 미혼모, 데이트 폭력 등을 통하여 접근하고자 하는 어떤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이러한 연결의 통로 또한 모호하다는 것이다. 지금 (《줄리아나 도쿄》는 2019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다) 소환되어 의미를 갖기에 불투명한 잔상들이 그만큼이나 애매한 소설의 형식 안에 흩뿌려져 있다.



줄리아나 도쿄 / 한정현 / 스위밍꿀 / 291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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