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더 높은 밀도의 시간을 살았던 사람이 여기의 내게 무해한 사람이길.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에는 내가 지나온 미성년의 시간이 스며 있다...“ 라고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말하였다. 정말 그렇다. 그렇게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그 스며들어 있는 시간들을 끄집어내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그때 거기를 들춰내지만, 지금 여기와 그때 거기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p.97, 최은영 <지나가는 밤> 중)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보다 밀도가 조금 떨어질 수는 있겠지만 어쩌면 열 살 이후 스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이 지닌 밀도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렇게 과거의 시간이 지닌 밀도는 현재의 시간이나 미래의 시간이 지닌 밀도보다 높다. 작가는 소설집에서 그렇게 더 높은 밀도의 시간에 치중하고 있다. 그렇게 더 높은 밀도의 시간을 살았던 사람이 무해한 사람이었기를 바라는 그런...
「그 여름」
“수이와의 연애는 삶의 일부가 아니었다. 수이는 애인이었고, 가장 친한 친구였고, 가족이었고, 함께 있을 때 가장 편하게 숨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수이와 헤어진다면 그 상황을 가장 완전하게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은 수이일 것이었다. 그 가정은 모순적이지만 가장 진실에 가까웠다...” (p.45~46) 수이와 이경의 사랑이 가지고 있던 빛깔은 그들의 사랑이 시작되었던 곳,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경이 다시 찾은 그곳, 그 다리난간 위에서 바라보는 강물의 색을 닮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601, 602」
“나의 아빠는 맏아들이었고, 결혼한 지 십 년이 지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한 엄마는 친인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늘 은근한 지탄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 잘난 맏며느리, 밖에서 일한다고 살림도 소홀히 하고 아들도 낳지 못하는. 그것이 엄마 이름 김미자 앞에 붙은 무겁고도 끈적이는 수식이었다. 엄마의 일부는 그 수식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엄마의 일부는 그 수식을 수의처럼 입고 있었다. 아들을 낳지 않는 한 벗어버릴 수 없는 무거운 옷...” (p.68) 601호와 602호, 나란히 살던 나와 내 친구 효진이... 나의 가족에게는 없는 아들이 효진이 집에는 있었고, 효진이는 그 잘난 오빠에게 두들겨 맞곤 했고, 효진의 엄마는 매질로부터 효진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의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는 어떤 매질에 관하여...
「지나가는 밤」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p.97) 엄마의 죽음 이후 윤희와 주희 자매는 어느 순간 멀어졌고 그 멀어짐은 오랜 시간 유지되어 버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 둘은 다시 한 공간에 머물고, 그 공간에 깃드는 것은 지나간 어떤 밤이자 지나간 모든 밤이다.
「모래로 지은 집」
“스물하나의 나에게 이 년이라는 시간은 내가 살아온 시간의 십 분의 일이었고, 성인이 되고 난 이후의 시간과도 같은 양이었다. 나의 선택으로 공무를 만났고, 일상을 나눴고, 내 마음이 무슨 물렁한 반죽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금씩 떼어 그애에게 전했으니 공무는 나의 일부를 지닌 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무와 떨어져 있는 나는 온전한 나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 식의 애착이 스물하나의 나에게는 무겁게 느껴졌다.” (p.131) PC 통신에서 만나 얼굴을 모르는 채로 몇 년을 지내고 성인이 되어 이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채로 또 몇 년을 보내고 있는 모래와 공무 그리고 나... 모래와 공무, 공무와 나, 나와 모래로 이어지는 이들 젊은 세 사람의 어느 한 때가 애처롭기도 하고 스산하기도 하고...
「고백」
“미주의 말과 미주를 바라보는 무당의 표정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스물하나의 나는 그 끌림의 이유를 알지 못했고, 미주는 내가 자신을 동정하고 있다고 했다. 나의 연민이 끔찍해서 더 이상은 연인으로 만날 수 없다고 말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지만 어떤 납득에는 십 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p.208) 그러니까 그때 미주와 만나고 헤어졌던 종은 지금 수사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미주는 자신의 더 오래 전 시간에 있었던 일을 종은에게 말한다. 그리고 이제 종은은 그때의 미주를 납득할 수 있다.
「손길」
“복잡할 것 없는 이야기였다. 여자는 혜인의 숙모였다. 여자는 삼촌과 함께 혜인의 부모를 대신해서 혜인을 양육했다. 일곱 살부터 열한 살까지 사 년 동안을. 혜인이 열여덟이 되던 해에 삼촌과 사별한 여자는 작별 인사도 없이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p.215) 그리고 십수년이 흘러 혜인은 시내의 집회에 나갔다가 숙모인 정희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퍼올려지는 기억들, 당시의 혜인이 숙모인 정희에게 품었던 마음들과 다시 대면하게 된다.
「아치디에서」
“근처에 큰 강이 있는데다 언덕이 있어서인지 아디치에는 자주 안개가 꼈다. 보통은 아침 아홉시 정도가 되면 걷혔는데 심할 때는 열한시가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그럴 때면 눈앞의 나뭇가지만이 볼 수 있는 것의 전부여서, 우리는 손목에 작은 방울을 달고 일했다. 가위를 든 서로를 방울 소리로 피해 갈 수 있도록...” 그러니까 아치디는 이런 곳이고, 나는 그곳에서 하민을 만났다. “하민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내게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조금이라도 그녀를 도우려 하면 불쾌해했다. 왜 모든 일을 다 자기 힘으로 하려는 것이냐고 묻는 내게 그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했다.” (p.274) 그러니까 하민은 그런 여자였다.
최은영 / 내게 무해한 사람 / 문학동네 / 325쪽 / 2018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