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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10. 2024

임현 《그 개와 같은 말》

던져진 난제에 도전하는, 도전하기만 하는 성글성글한 문장들...

  몰두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데 묘하게 밀어내는 구석도 있다. 듬성듬성 허투루인 듯 하다가 또 짐짓 진지한 체 하기도 한다. 수식을 통해 하나의 답에 도달하는 수학이 아니라 던져진 난제에 도전하는, 도전하기만 할 뿐 해결에 이르지 못하는 수학을 닮아 있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문장이 성글성글하다. 밝음보다는 어둠을 묘사하는 문장들인데도 그렇다. 그게 신기해서 일단 연거푸 읽게 되었다.


  「가능한 세계」

  “아빠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우리는 자주 먼 거리를 걸어 다녔다. 그런 날에는 집에 돌아와 깊이 잠들 수 있었다. 신발장에는 여전히 구두가 있고, 욕실에는 칫솔이 걸려 있고, 면도기, 숟가락, 서류가방, 액자와 스킨, 곳곳에 빠진 머리카락, 공기 중에 냄새, 서랍을 열면 아빠의 물건들이 무섭게 튀어나오는데도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우리는 멀리 가지 않고도 잠들었다. 늦잠을 잔 날에는 아빠에게 몹시 미안해졌다. 배가 고플 때도 그랬다. 엄마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혼자 남을 엄마를 떠올리면 나는 그게 가장 염려스럽다.” (p.26) 이것은 내가 적는 1일차의 기록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 실려 있다. 소설은 또 다른 1일에서 시작되고 5013일의 기록까지가 띄엄띄엄 적혀 있다.  


  「고두叩頭」 

  “... 예야, 내 말 좀 들어보렴. 인간들이란 게 말이다. 원래 다들 이기적이거든. 태생적으로 그래. 처음부터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거란다.” (p.60) 오래전 어쩔 수 없어 불량아로 낙인이 찍혀야 했던 연주, 그 연주를 보호하려다 불가피하게 성관계를 하였고 연주는 떠났고 나도 학교를 떠나야 했던 기억, 나는 아니 인간은 원래 그런 거니까. 그렇게 세월이 흘러 다시 돌고 돌아 또 다른 사건으로 만나게 된 나 아니 인간...


  「엿보는 손」

  “마주한 여자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을 아버지를 떠올리면 나는 자꾸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 무렵, 아버지를 진짜 부끄럽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실은 그냥 부끄러워지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중에라도 부끄럽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생을 단지 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아무래도 그래서였다고 생각합니다...” (p.79) 삶을 베끼는 것과 문장을 베끼는 것과 작품을 베끼는 것과 삶을 베끼게 되는 것... 자신의 손을 그리는 손을 그리는 손이 등장하는 그림이 떠오른다. 표절과 소설 속의 누군가가 소설 바깥의 나를 살해하려고 다가오는 장면이 압권이었던 소설도 떠오른다. 그린 이와 쓴 이가 누구였는지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다. 르네 마그리트였나, 사키였나...


  「좋은 사람」

  “... 우재에게는 그런 재주가 있었다. 불편한 이야기를 불편하지 않게 말하면서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잘 드러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우재를 잘 알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p.97) 우재라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우재를 잘 모르겠다. 역시 우재의 이야기는 우재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만 알 수 있다. 우재를 아는 누군가가 말하는 우재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가 좋은 사람인지 어떤지...


  「무언가의 끝」

  아버지가 죽고 형수가 생기고 형이 죽고 형수가 떠나고 집이 남고, 집에 내가 남았다. 길을 물어보는 중년의 여자와 중년 여자가 가려고 하는 가든 마트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하는 나, 그리고 그 가든 마트에서 기다린다는 사람이 있다.


  「그 개와 같은 말」

  세주와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연경에 대해 떠올리고 말한다. “... 연경과는 독립적으로 기억하는 연경의 이야기가 하나 있다. 간혹 나는 그 이야기를 내가 겪은 것처럼 남들에게 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연경이 어떤 사람이었다, 라는 것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그 말을 들었던 주변이 상황이라든지, 그때의 감정 같은 것들을 느끼곤 한다...” (pp.162~163) 오래전 연경을 떠올리면서 개도 떠올렸는데, 연경과는 헤어졌고, 연경에 대해 말하였던 세주와도 이미 헤어졌는데, 겨울에 죽은 그 개는 떠올리기를 멈추지 못하였다.


  「거기에 있어」

  “사고가 있었다. 무영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은 과연 어느 쪽의 사고 때문이었을까? 은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난잡한 질문들 속으로 빠져들었다...” (p.200) 자동차를 몰고 낯선 곳을 지나다 사고가 나고 노인과 아들이 사는 곳으로 가고,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돌아나오다 다시 사고가 났고 무영은 한 쪽 팔을 잃었다.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 분명 그날 이후로 은우는 무언가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은우는 알지 못했다.” (p.201) 


  「외」

  "고작 취한 상태로 오다가다 잠깐 마주친 사람이잖아요. 그런데도 그 남자가 자기라는 거예요. 자기를 꼭 닮았다고요. 그 사람이 아주 질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는데 누군가는 남편이 저지른 일로 오해할 수도 있다고, 심지어 나조차도 구분하지 못할 걸고 했습니다. 남편의 마앙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했어요. 이전에도 그이는 종종 발견되고는 했습니다. 어디서 봤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실은 그중에 몇은 진짜 내 남편이었을지도 몰라요. 내가 모르는 곳에서 다른 사람인 척 행세를 했던 게 아닐까. 아마 그걸 들켰던 게 아닐까.“ (p.225) 남편과 정말 닮은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남편이었을까, 아니면 남편과 닮지도 않은 사람을 남편은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내 남편은 정말 내 남편이긴 한 걸까, 같은 질문보다 제목이 왜 ‘외’ 이지...


  「말하는 사람」

  “나는 가끔 내가 의자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답답한 거 아닌가. 누가 내 위에 앉아 있어서 어깨가 저리고 가슴이 답답한 게 다 그런 이유에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p.229) 오래 전 문영이라는 여자와 유스호스텔에서 만났고 가까워진 적이 있다. 오래 전 일인데, 나는 문영이 쓴 글에서 나를 발견하고 문영을 떠올린다.


  「불가능한 세계」

  <가능한 세계>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등장한다면 <불가능한 세계>에서는 ‘곱셈은 덧셈보다 어려운 문제인가?’ 라는 문제가 등장하고, 소진이 어린 시절 키우던 고양이가 등장한다. 소진의 아버지이자 민재의 장인이 몰두하고 있는 현재의 문제가 등장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제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중이다.



임현 / 그 개와 같은 말 / 현대문학 / 306쪽 / 201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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