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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3. 2024

편혜영 외 《술과 농담》

더럽게 야만적이었지만 농담 같은 일도 빈번하던 시절...

  문학회의 선배는 주량이 어떻게 되느냐고 질문을 했다. 내게 던진 거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지금은 소주 ‘몇’ 병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하자, 선배는 여름 방학 이전에 최소한 소주 ‘몇몇’ 병을 마시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니까 내 주량이 세 달 이내에 두 배로 늘어갈 것이라는 장담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이고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인지 등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마시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종종 술 마시는 일에 대해 생각을 한다. 그저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떨리는 손을 감추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조금 더 마시려 애쓰고, 술 마시는 걸 자책하고 숨기려다 남몰래 마시며 불안한 안도감을 느끼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술 없이 부끄러움에 맞서기 싫을 때, 세계가 짐짝 같은 무게로 업혀올 때, 오래된 관계를 내가 다 망쳤다 싶을 때, 아무리 달리 보려고 해도 내 마음이 하찮을 때, 가까운 사람에 대한 연민과 실망으로 마음이 그을릴 때, 한마디로 제정신인 걸 참을 수 없을 때 그런 생각을 한다.” (p.26, 편혜영 <몰(沒)> 중)


  바로 그날 저녁이었는지 다음날이었는지 강남집으로 향했다. 천정은 낮고 벽은 가까웠다. 예닐곱 명이 차곡차곡 앉으면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다. 작은 공간의 가장 귀퉁이가 내 자리였다. 소주와 소주잔 그리고 청양 고추가 전부인 술자리가 준비되었다. 선배가 따라준 술잔은 꺾을 수 없었고 안주로는 청양 고추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물주전자는 친절하게도 서빙 되지 않았는데, 고추가 매우면 소주를 따라 마셔야만 했다. 그야말로 야만의 시절이었다.


  “붕괴하는 세계였다... 뿌연 형광등이 매달려 있던 천장이 갑자기 내 머리 위로 쿵 떨어졌고 바닥은 수직으로 숫구쳐 나를 덮쳤다. 어떤 거대한 손이 술집을 성냥갑처럼 들어서 흔드는 듯 술집 안의 모든 사물들이 붕 떠올라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의자와 테이블, 컵과 접시와 포크가 한데 뒤섞이는 것만 같았던 어지러움······.” (p.47, 조해진 <조금씩, 행복해지기 위하여> 중) 


  선배의 장담처럼 여름 방학이 되기 전에 주량은 두 배를 넘어섰다. 청양 고추가 아닌 다른 안주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술을 마시고 욕지기가 솟는 것은 참기 어려웠다. 한 선배가 과거의 이야기를 하나 해주었다. 여자 선배가 하나 있었는데, 후배가 오바이트를 하려고 하면 조용히 스타킹을 벗었단다. 그리고는 그 스타킹에 토하게 한 뒤, 액체만 짜내고 남은 건더기는 다시 탁자 위에 올려버렸단다. 그 장면을 목격한 이들이라면 (그 날은 모르겠지만) 다시는 오바이트를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어느 날부터 오바이트를 하지 않게 되었다. 더럽게 야만적인 시절이었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과 자전거를 탄 사람이 우리를 지나쳤다. 벽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 오래된 미용실 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보았고 부동산 앞에 주차된 흰색 차의 보닛 위엔 고양이 한 마리가 올라앉아 있었다. 그 골목으로 택배차량이 들어섰다. 보라와 나는 구석으로 가 걸음을 멈췄다가 차량이 지나간 후 다시 걸었다.” (pp.154~155, 이주란 <서울의 저녁> 중)


  선배가 되었고 후배들과 함께 경춘선이 지나는 어느 으슥한 곳에서 벌어진 전국 단위의 문학회원들 일꾼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모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우리는 독재 정권의 방해라고 우기며, 운동가를 떼창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한 지역에서 선창을 하면 나머지 지역의 모두가 그 뒤를 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다들 지쳐갔고 흩어져 잠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막 자려는데 남도의 한 대학에서 가장 잘 마신다는 여학우와의 술자리가 마련되었다는 전갈이 왔다.


  “농담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그 말에 대해서 거리를 둘 때 발생한다. 거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농담 속에서 여유와 숨 쉴 공간을 갖게 된다... 진심을 말하는 사람은 거리감을 지우려 한다. 말과 진실 사이의 거리를, 자신의 말과 타인 사이의 거리를 없애기 위해 분투한다... 아이러니는 농담과 진심의 이분법에 균열을 낸다. 그것은 농담이면서 농담이 아니고 진심이면서 진심이 아니다. 거리감을 통해 진심에 이르고자 하는 농담, 또는 농담의 거리감을 넘어서려는 진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더 간단하게는, 위장된 진심 또는 진실한 농담이라고.” (p.189, 이장욱 <술과 농담과 장미의 나날> 중)


  몇 명의 관중이 있는 상태에서 여학우와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 번에 꼭 세 잔씩을 마시는 여학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중들은 사라졌고 둘만 남았다. 시간이 지나 나는 술잔을 그만 거두었다. 여전히 한 번에 세 잔씩을 마시는 그녀에게 술을 따랐다.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 여전히 세 잔씩을 마시던 그녀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내게 손바닥을 보였다. 그만 마시겠다는 제스처였다. 세어보니 아홉 병을 마신 다음이었다. 그리고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조용히 일어나 방을 나서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지막이 말했다. “그만 마실래요, 취할 것 같아요.” 더럽게 야만적이었지만 농담 같은 상황도 빈번하던 시절이었다.



편혜영, 조해진, 김나영, 한유주, 이주란, 이장욱 / 술과 농담 / 시간의흐름 / 199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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