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있다는 자각보다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실상...영화를 보고
*2022년 2월 17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요즘 아내는 열 시면 잠자리에 든다. 마라톤 완주를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 중인데, 주중에는 동네 피트니스 센터의 트레드밀에 오르고, 주말에는 잠실 보조경기장의 트랙에서 달린다. 이 훈련을 위해 새벽에 일어난다. 아내와 내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의 차는 그래서 다시 네 시간 정도로 벌어졌다. 이전에 아내는 열두 시를 전후하여 잤고 나는 새벽 네 시를 전후하여 잤다. 최근 내가 새벽 두 시를 전후하여 자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시간차는 두 시간 정도로 좁혀졌지만, 아내의 새벽 훈련으로 다시 네 시간으로 벌어졌다.
아내가 잠자리에 들고 난 이후의 시간에 나는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본다. 병증이 도지고 며칠 동안 우울함으로, 아내가 자러 들어간 이후 새벽 시간 동안 멍한 상태로 영화를 보곤 하였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해피 아워>는 그 시간에 호출한 여러 영화들 중 하나였다. 나는 <해피 아워>를 삼 일에 걸쳐 나눠서 보았다. <해피 아워>의 러닝 타임은 328분, 그러니까 다섯 시간 이십팔 분이다.
러닝 타임을 익히 알고 있어 애초에 끝까지 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틀어놓고 멍하니 앉아 있다 보니 끝까지 갔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네 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후미가 기획하고 친구 사이 인물들인 아카리, 사쿠라코, 준이 함께 하는 워크숍 장면이 등장한다. 삼십여 분에 걸쳐 물건의 중심 잡기, 그리고 사람의 중심을 확인하는 워크숍인데 그 전 과정이 영화에 담겨 있다.
영화를 모두 본 다음에 영화를 설명하는 짧은 프로그램에 등장한 평론가는 이 워크숍 장면과 영화의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낭독회 장면을 위기의 장면으로 꼽았다. 그러니까 이 두 고비를 넘겨야 영화 감상을 완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화 서두에 등장하는 워크숍 장면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것은 자신이 두 번째 영화를 보고 나서였다고 덧붙였다. 음, 그러니까 <해피 아워>를 두 번 감사하였다면 열한 시간 동안 한 편의 영화를....
줄거리를 나열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네 명 중년 여성들이 나누는 우정? 혹은 그녀들이 우정으로 감싸 안은 채 받아들이고 견뎌내고 넘어서는 위기? 어떤 것을 중심 메시지로 삼을지 논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 영화를 틀어놓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저 바라보게 된다는 사실이 존재할 뿐이다. 영화를 보고 있다는 자각보다는 가까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실상이 앞서는 경험이 진하다.
그렇다고 아주 지루한 영화라고 지레 겁을 낼 필요는 없다. 앞서 이야기한 두 차례 위기의 장면을 잘 넘어가고 나면 영화 후반부에서는 일종의 일상 속 스펙터클이라 할 법한 순간이 등장하기도 한다. 발이 부러진 채로 바에서 음악에 몸을 맡기는 아카리, 천상 가정주부 같았지만 하룻밤 섹스 후 출근하는 남편에게 그 사실을 사무적으로 알리는 사쿠라코, 밤새 길을 걷다 집으로 복귀한 후 이혼 선언을 하는 후미가 있다. 물론 이혼 재판에서 패소한 준이 이들 모두를 떠난 뒤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영화를 본 다음 문득, 혹시 결혼 생활 동안 이혼을 떠올린 적이 있냐고 아내에게 묻고 싶어졌다. 결혼 초 아내에게 위협 아닌 위협을 한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아이라는 연결 고리가 없을 예정이다, 그러니 만약 다투고 등을 돌리면 우리는 온전히 남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되도록 다투지 않기를 원한다고 하였고 아내도 수긍하였다. 결혼 초에 우리는 삼 년에 두 번 정도 다퉜다. 이즈음에는 삼 년에 한 번 정도 그러는 것 같다.
나의 병증이 다시 나타난 이후 아내가 걱정스럽게 오늘은 상태가 어때, 하며 나를 바라보곤 한다. 나는 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그럭저럭 여전해, 라고 대답한다. 그것과는 별개로 아내는 새벽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아내의 이런 매우 성실한 태도를 아내와 처음 만난 1991년도에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귀하게 여겼다. 그건 그렇고 이혼에 대한 질문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아내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
해피 아워 (Happy Hour) /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 타나카 사치에, 기쿠치 하즈키, 미하라 마이코, 카와무라 리라 출연 / 328분 / 2021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