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리우 《종이 동물원》

후후 웃다가 어느 순간 심각해지고 결국 눈시울을...

by 우주에부는바람

“내 부탁을 받고 엄마는 포장지로 염소와 사슴, 물소도 접어 주었다. 거실을 뛰어다니는 종이 동물들을 라오후는 으르렁거리며 쫓아다녔다. 그러다가 붙잡으면 발로 꾹 눌러 댔고, 공기가 빠져서 납작해진 동물들은 접힌 종이로 변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숨을 불어넣어서 동물들이 조금 더 뛰어다닐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따금씩 종이 동물들이 말썽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한번은 물소가 저녁 식탁에 놓인 간장 종지에 뛰어든 적도 있었다(물속에서 뒹굴고 싶었던 것이다, 진짜 물소처럼.). 내가 재빨리 꺼내주었지만, 모세관 현상 탓에 이미 허벅지까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간장에 젖은 다리 때문에 똑바로 설 수가 없었던 물소는 식탁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내가 햇볕에 말려 주었는데도 물소는 다리를 절게 되었고, 그후로 절뚝거리면서 사방을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나중에 엄마가 랩으로 다리를 묶어 주자 온 사방을 마음껏 뒹굴었다(간장 종지만 빼놓고.).

한편 라오후는 나와 함께 뒷마당에서 놀 때 참새 떼한테 덤벼들기를 좋아했다. 한번은 구석에 몰린 참새가 다급한 나머지 반격을 해서 라오후의 귀를 찢어 놓았다. 나는 움찔 놀라서 낑낑대는 라오후를 안고 엄마한테 갔고, 엄마는 테이프로 라오후의 귀를 붙여 주었다. 그 후로 라오후는 새들을 피했다.” (p.16, <종이 동물원> 중)


여기까지 읽을 때만 하여도 <종이 동물원>이 그렇게 슬픈 방식으로 진행될 줄을 전혀 몰랐다. 나의 엄마는 중국에서 홍콩으로 넘어갔다가 그곳에서 결혼 중개 회사의 카탈로그에 사진을 올렸다. 나의 아빠는 홍콩에서 엄마를 만났고 카탈로그의 내용이 (영어가 가능하다는)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엄마를 미국으로 데려온다. 1년 후에 나는 태어났고 엄마는 내게 종이로 만든 호랑이(라오후)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여러 동물을 만들어준다.


하지만 나는 나이가 들면서 영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지 못하는 엄마와 멀어지기 시작한다. 종이로 만들어진 동물 대신 다른 장난감을 원하게 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버린다. 나는 대학생이 되고 다른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엄마가 병에 걸리고, 엄마는 내게 종이 동물을 넣어놓은 상자를 열어봐 줄 것을 요구한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학교로 돌아가는 동안 엄마는 숨을 거두었다.


책은 중단편을 묶은 소설집이지만 <종이 동물원> 한 편을 읽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수 있다. 후후 웃다가 어느 순간 심각해지고 결국 눈시울을 붉히게 된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다가 살짝 울 뻔하였다. <종이 동물원>은 휴고 상과 네뷸러 상은 물론 세계환상문학상까지 유력한 권위의 SF 판티지 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품인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이야, 라고 말할 수 있다.


나머지 작품들도 즐기기에는 충분하다. <천생연분>은 손안의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결정해버리는 근미래 세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이버 펑크 계열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류를 시정하기 위하여 자신들에 반하는 혁명 집단까지 컨트롤해버리는 거대한 알고리즘이 등장한다. <즐거운 사냥을 하길>은 요괴물인 동양 판타지와 사이버 펑크가 결합되어 있다. 요술이라는 힘을 크롬으로 이루어진 살갗과 각종 구동 장치가 대신하게 된다.


<상태 변화>에서 등장인물들은 각자 다른 형태(혹은 상태)의 영혼을 갖는다. 리나의 영혼은 각얼음이고, 빈센트의 영혼은 양초이고, 엘리엇의 영혼은 커피이고, 잔의 영혼은 나무이고, 키케로에게는 조약돌이 있었고, 에이미의 영혼은 담배 한 갑이었다. 일종의 도시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파자점술사>는 역사와 결합된 판타지인데, 타이완의 역사와 관련된다. 한자를 이용한 점술이 흥미롭다.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은 여러 우주인들이 어떤 식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유사한) 책이라는 것을 만드는지 보여준다. <시뮬라크럼>은 ‘피촬영자의 의식 패턴을 촬영한 스냅 사진’을 ‘캡처하고 디지털화한 다음, 이것을 이용하여 프로젝터로 영사’하는 시스템이다. 이후 개량되었지만 발명자의 딸은 바로 이 발명품 때문에 아버지와 크게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레귤러>는 추리물과 결합된 소프트 SF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심리를 조정하는 레귤레이터라는 시스템 그리고 안구에 시술되는 카메라라는 장치가 살해당한 창녀와 그 범인을 잡는 데 역할을 한다.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은 그러니까, 어렵다. <파(波)>는 스페이스 오페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지구를 찾아 떠난 여행인데, 불멸의 삶을 선택할 것이냐, 자연스러운 죽음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물음을 던진다.


<모노노아와레>도 우주 탐사물이기는 한데 어떤 덧없음을(‘모노노아와레’는 ‘삶의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지는 감정’이라고 히로토의 아빠는 말한다) 기린다.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略史)>는 일종의 대체 역사물이자 스팀 펑크(?)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상하이, 도쿄, 시애틀이라는 터미널을 거치며 아시아와 북아메리카를 연결하는 해저 터널이 등장하고, 아예 그 지하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있다.


<송사와 원숭이 왕>은 청나라 건륭제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작가는 열 살에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 정착하였는데 여러 소설에서 중국 혹은 타이완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그렇다. 일본의 731부대와 바로 그 시절로 사람을 보내서 실재하는 사건을 볼 수 있는 뵘기리노 입자가 등장한다.


“... 일본의 좌파 진영에서는 평화 운동 세력이 2차 대전 기간의 모든 고통을 전쟁이라는 개념 자체의 잘못으로 돌렸고, 죄책감 대신 보편적 가치인 용서와 세계 만국의 평화를 주창했습니다. 중도파는 전쟁의 상흔을 덮기 위한 방책으로서 물질적 성장에 치중했습니다. 우파에서는 전쟁 책임에 대한 의문 자체가 애국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단단히 결합되어 있습니다. 국가 자체와 구분되는 나치즘을 비난의 표적으로 삼을 수 있었던 독일과 다르게, 일본은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비난당하는 느낌을 주지 않고서는 2차 대전 중에 일본인이 저지른 잔학 행위를 인정하기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pp.530~531,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중)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의 웨이 박사는 자신들의 과거사를 사과했다는 일본 대사를 향해, 추상적인 사과는 하지만 개별 범죄의 인정과 희생자들을 기리는 일은 거부하고, 사과 담화문 이후 유력 정치인이 의혹을 제기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쇼’의 형태를 띤 사과라고 비판한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피해자라는 일면을 작가와 공유하다보니 더욱 몰입하여 읽게 된다. 책에는 이렇게 열네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켄 리우 Ken Liu / 장성주 역 / 종이 동물원 (The Paper Menagerie And Other Stories) / 황금가지 / 567쪽 / 201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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