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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7시간전

손홍규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무심코 절절해 보이는 소회들이 주옥같이 이어지는...

  산문집은 <절망을 말하다>, <문학은 네가 선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 <수많은 밤들의 이야기>, <슬픔과 고통으로 구겨진 사람> 이라는 네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고, 책의 말미 <미니픽션>이라는 꼭지에는 헛것들과 불한당의 소설사라는 두 개의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다. 첫 번째 챕터의 문장과 이야기는 눈물이 나올 만큼 아름답다. 세 번째 챕터는 웃기기도하고 슬프기도 하다. 그야말로 웃프다, 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챕터의 글들은 첫 번째 챕터의 글들과 조금 겹치기도 한다. 어딘가 지면에 칼럼으로 실었던 글들인가 싶게 잘 정제되어 있다. 


  “소름이 돋았다. 언젠가 암소의 혀가 핥고 지나간 적 있던 내 손등 위에 속삭이는 말처럼 은밀하면서 간지러운 것들이 돋아났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나는 외양간으로 가서 얼어붙은 두엄을 밖으로 치웠다. 술기운이 잦아들면서 차가워졌던 몸이 달아올랐다. 식은땀이 흘렀다. 소를 팔았지만 우리집은 여전히 가난했다. 내게 그 소가 대학 등록금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아버지는 주무신다. 어머니는 맑은 물로 무쇠솥을 부시어내고 주인을 잃은 외양간으로는 사방에서 사나운 시선 같은 찬바람이 몰아친다. 쇠스랑을 쥘 자격이 없는 손아귀 가득 더운 땀이 배어난다. 아버지는 내게 물었다. 그래, 소설이라는 걸 쓸 테냐. 아버지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이래도 소설이라는 걸 쓸 테냐. 나는 고개를 저었는데 무엇을 부정하는 거였는지는 아버지 역시 확신할 수 없었으리라. 쓰고 말고 할 게 있나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으나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제기랄, 소설은 이미 저 소가 다 써버린걸요. 세상이 들려준 이야기를 받아 적는 것만으로도 소설이 되는 비장하게 희극적인 삶을 삭제할 수 없는 나로서는 여전히, 문학은 소다.” (p.22)


  ‘문학은 소다’는 산문집을 여는 첫 번째 글이다. 우시장에 들러 소를 팔고 돌아온 다음의 소회가 적힌 부분을 따로 떼어 옮겨 적어 보았다. 그 안에서 어린 작가가 그만큼 무심코 절절해 보였기 때문이다. 소를 팔아 등록금을 대는 일이 흔하던 시절이다. 세상 쓸모 있는 소를 팔아 그 돈을 세상 쓸모없어 보이는 소설 쓰는 아들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아비의 심정은 또 어떠하였겠는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할머니의 형제였던 넛할아버지는 자주는 아니었고 일 년에 꼭 한 번씩 우리집을 찾아왔다. 찾아오는 시기는 날을 받아둔 것처럼 일정했는데 첫눈이 내리고 서리가 내려앉고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희고 푸른 하늘이 떠오를 무렵이었다. 내가 지금도 기이하게 여기는 것 가운데 하나는 그 시절 전화는커녕 다른 기별조차 없었건만 오라버니가 오는 날을 틀림없이 알아 그날 아침이면 아버지에게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술을 한 되 받아오길 청하는 거였다. 그런 날이면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점심때 못 미쳐 지게를 진 넛할아버지가 마당으로 들이닥치기 마련이었다. 지겟작대기를 탁탁 찍으며 눈 덮인 산길을 넘어온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그것도 제대로 된 신도 아닌 짚신이나 고무신을 신은 채 병에 든 술을 한 모금씩 삼키며 허위단심 넘어왔으련만 힘든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이 그 볼품없이 검게 타고 쭈그러든 얼굴이 환하게 피어나며 지게를 내려놓고 토방에 올라서 막 댓돌에 내려선 누이의 두 손을 마주잡는 거였다. 당신들 사이에 별다른 말이 오가지는 않았다. ”오라버니, 외깄소.“ ”누이, 잘 지냈는가.“ 그러고는 아랫목을 서로 양보하다 비스듬히 몸을 틀고 나란히 앉아 넛할아버지는 점심으로 술을 마시고 할머니는 오라버니가 지게에 지고 온 곶감 가운데 하나를 먹었다. 그러고 나면 넛할아버지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누이의 손등을 한 번 쓸어주고는 다시 지게를 지고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는 거였다.』 (pp.54~55)


  첫 번째 챕터에는 소설가의 가족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는 할머니도 있다.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지만 일찍 돌아가신 탓에 기억 가능한 많은 추억이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길어 올린 위의 이야기는 아름답다. 하루를 온전히 쏟아 나이 먹은 누이를 찾은 나이 먹은 오라비의 심경, 그렇게 먼길 찾아온 오라비를 잠시 옆에 두고 다시 떠나보내는 누이의 마음이 잠시 읽는 이를 먹먹하도록 만들고 만다.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노인들을 생각하다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노인이 된 부모가 보인다. 당신들은······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을 바쳐 노인으로 다시 태어났을까. 그리고 지금 나와 더불어 노인이 될 게 분명한 아내와 노인이 된 우리를 기억해줄 딸아이를 본다. 혈통처럼 세월이 흐르고 꽃잎이 분분히 떨어져 사연처럼 쌓이고 해가 저문다. 삶이 이슥해지는 시간들. 사소하고 비범한 우리의 노년이 자박자박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p.62)


  글을 쓰며 흘러 보낸 시간들이 산문집의 곳곳에 있다. 거기에는 작가 자신의 시간도 있고 작가의 가족의 시간도 있다. 그가 젊은 시절을 보낸 문학 동호회에서 흘러가는 시간도 있고 집도 절도 없는 그를 잘도 받아준 친구나 선후배와 함께 보낸 시간도 있다. 그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여기까지 왔노라고 말한다. 그 시간들이 제대로 쌓인 덕분에 작가는 이제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소리에 크게 놀라지 않는다.


  “... 이문구 선생은 어느 산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낙향해 살던 선생은 어느 날 시내로 장을 보러 나갔다가 맘에 쏙 드는 생선을 보았으나 혼자서 사먹기에는 분에 넘치는 반찬거리인지라 값도 묻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한 노부인이 생선장수 함지박 앞에 서더니 다짜고짜 넙치를 손에 들고 ‘월매나 헌댜?’라고 물었다. 생선장수는 만 원은 받아야 하지만 마수걸이니 팔천 원만 달라고 했다. 노부인은 넙치를 던지듯이 놓으면서 ‘팔천 원이라고 이름 붙였남’ 하고 불퉁거렸다. 그때부터 생선장수와 노부인 사이에 흥정이 시작되는 거였다. 소설가 한창훈도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고추를 좀 사려고 여수항 근처를 기웃거리던 그는 때깔 좋은 고추를 늘어놓은 노점상을 발견하곤 주인사내에게 얼마냐고 물었다. 그해 고추 작황이 좋지 않아 웬만하지는 않으리라 짐작은 했으나 듣기에 귀가 아플 만큼 비쌌던지라 그도 고춧값이 뭐이리 비싸냐고 투덜댔다. 그 말에 주인사내는 기분이 좋다 나쁘다 식의 말 대신 ‘그러게 말이오. 사람 고춧값은 싸디 싼디’라고 하는 거였다. 주인사내의 신세한탄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런 말을 듣게 되면 고추를 두어 근쯤 팔아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인정일 테다. 그 소설가들의 문장이 일상에서 길어올린 평범한 언어임에도 싱싱하고 눈부실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이들이 남의 말에 무심하기는커녕 외려 사소한 한마디에 담긴 진정을 헤아릴 줄 알았기 때문이리라...” (pp.246~247)


  옮겨 적다가 중간에 끊지를 못하겠다. 하나의 호흡으로 길지만 매끄럽게 써내려가고 있어서 그런 듯하다. 그래서 길게 인용하고 말았다. 착착 혀에 감기는 문장들을 실컷 읽었다. 책의 삼분의 일을 읽은 것은 홍제천변에 자리한 카페에서였다. 등산복장을 한 이들 열댓 명이 이층에 있어서 일층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어수선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손홍규 /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 교유서가 / 345쪽 / 20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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