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빼고 매뉴얼에 따라 진행시키던 인간 관계가 삐걱거리는 한 순간..
나 요스케는 학창 시절에 럭비를 했다. 아마추어를 뛰어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진심으로 럭비를 대했고 그래서 팀의 주장까지 했다. 현재는 대학교 4학년 졸업반으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지만 그 인연으로 자신이 주장을 했던 사립 학교의 팀에서 코치로 활동을 하고 있다. 코치를 하고 나면 팀의 감독인 사사키네 집으로 가고는 하는데,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사사키의 부인이 내놓는 고기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사키네 집에 가려면 국도를 타야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언젠가 사사키가 국도라고 하는 걸 들었을 뿐 진짜 국도인지 확인한 적은 없었다. 차가 멈춰서 왼쪽을 보니 옷을 입은 하얀 치와와가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모를 뿐이지 치와와는 원래 다 하얀 건지도 모른다.” (p.10)
소설 진행의 근간을 이루는 문장의 기술 형식은 여타의 일본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위와 같은 경우인데, 얼핏 보면 재미있지만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들여다보면 성의가 없는 거 아냐, 하는 느낌이 든다. 아래의 대화도 비슷한 경우에 속한다. 대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나도 인정하듯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주고 받지만 (좋게 이야기 한다면 독자의 몫으로 남기는 셈이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그래도 모처럼 홋카이도까지 왔는데 아깝지 않을까? 그런 건 평소랑 똑같잖아. 좀비 영화라면 언제든지 볼 수 있고.”
“모처럼 홋카이도까지 와서 그런 걸 하니까 가치가 있는 거에요.”
아카리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했다. 나는 일단 미소를 짓고, 왼손으로 아카리의 오른손을 잡았다. 아카리의 손은 아직 차가웠다. 그렇지만 금방 따뜻해질 것이다.』 (pp.155~156)
문장의 이러한 기술 방식은 일본의 문학상 수상 소설들에서 많이 맞닥뜨리게 되는 요렁부득에 해당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캐릭터의 구체적인 다양함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비슷비슷한 캐릭터라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사소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파국》의 나(요스케) 또한 그렇게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성실한 것 같지만 요령이 없고 여성에 대해 배려하지만 조금만 삐끗하면 폭력으로 변질될 우려가 다분한 인물이다.
“... 오른쪽 여자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다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리 간격이 가까운 걸 핑계 삼아, 나는 그 여자에게 일부러 다리를 갖다 대려고 했다. 그렇지만 내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그만두었다. 공무원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그런 비열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대신 의자의 위치를 신중하게 조절하는 체하며 그녀의 다리를 훔쳐보았다...” (pp.32~33)
그렇게 소설에는 나와 관계를 맺는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마이코는 정치 분야에 진출할 의도를 가지고 바쁘게 생활하고 있고, 아카리는 친구인 히자의 개그 공연에 갔다가 만난 신입생이다. 나는 사귀고 있던 마이코로부터 멀어졌고 적극적인 아카리에게 이끌려 이제 그녀와 함께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동이 (코치로 가르침을 받는 아이들이 나누던 이야기 속에 비친 자신을 확인한 것과 함께) 결국은 그를 파국으로 이끌고 만다.
“아카리는 지금까지 이런 경험이 없어서 조금 무섭다고 말했다. 나는 무섭게 만든 걸 사과했다. 아카리는 얇은 이불을 눈아래까지 끌어올려 덮고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나는 아카리의 허락을 얻어 화장실에 갔다. 손을 씻기에는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나왔는데, 침대 위에 아카리가 없었다. (pp.81~82)
책의 뒷날개에는 일본 아마존 독자 리뷰가 몇 개 정리되어 있다. 이 중 ”잘못된 사회 ‘설명서’를 따라가던 한 인간의 파멸“이라는 문장이 유독 눈에 띈다. 소설 속의 나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만 같다. 학생을 가르치고 친구와 선배를 만나고 여자 친구를 바꿔가며 사귀지만 그렇다. 감정이 섞이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들인데, 감정 없이도 무난하게 해나가고 있어 신기하다. 나는 자신만의 감정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인 것만 같다. (뒷날개의 리뷰 중에는 ”쓸모 없어진 로봇의 결말“이란 것도 있다.) 그리고 소설에는 나의 부모를 비롯한 혈연관계의 인물들이 일부러 피하고 있기라도 하듯 등장하지 않는다.
도노 하루카 / 김지영 역 / 파국 (破局) / 시월이일 / 206쪽 / 2020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