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별난 캐릭터로 엉뚱한 방향 전환을 변명하며 유지시키는...
“... 인생에서 남녀 문제에 이렇게나 무게를 두는 내게 이런 말을 듣고 싶지 않겠지만, 이 세상에는 연애나 섹스 외에도 정말 멋진 게 많잖아요. 예를 들면, 좋은 흙······.” (p.142)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이런 식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방향을 휙 틀어버린다. 그리고 이어서 그러한 방향 전환을 합리화시킬 궁리를 하면서 아주 천천히 또 말을 이어가는 식이다. 원체 엉뚱한 방향 전환이었으니 쉽사리 합리화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어쨌든 들어선 길이니 계속해서 나아간다, 는 식으로 말이 계속되니 어느 때는 불필요한 변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사가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다. 사가가 나의 그런 시간을 먹고사는 한, 사가를 보고 싶다고 바란다. 그렇게 어디와도 이어지지 않는 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앞날도 꿈도 없고, 과거의 무게만 산더미만 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숨이 막힌다... 아직은 어쩔 수 없다. 둘이 이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수밖에 없다.” (pp.22~23)
요시모토 바나나의 이런 엉뚱한 방향 전환과 이어지는 느린 변명이 예전에는 그렇게 싫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작가가 만들어내는 인물의 캐릭터가 어느 정도 완충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요시모토 바나나의 캐릭터들은 감정을 들키는 일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순진무구하다. 그러한 순진무구함이 꽤나 비현실적인데, 굳이 현실의 한복판에서 생활하고 있어 더욱 유별나보이곤 했다.
“나는 원룸의 갑갑함을 좋아하지 않아, 굳이 사가가 사는 남자 기숙사만큼이나 허름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돈도 절약되고, 햇볕도 잘 드는 데다 바람도 잘 통한다. 문틈이 벌어진 데가 많아 난방도 냉방도 제 구실을 못 했지만, 추우면 옷을 더 입든지 자 버리면 그만이다. 더우면 몇 번이든 샤워를 하면 된다.” (p.52)
《새들》에서 그렇게 유별난 캐릭터를 실천하고 있는 것은 마코와 사가이다. 마코는 일찍 아버지를 잃었고, 마코의 엄마는 아빠가 생전에 친했던 다카마쓰 씨에게 많은 것을 의지했다. 다카마쓰 씨는 브라질에서 온 신부주의자였고 마코의 엄마와 사가의 엄마는 그 사상에 동의하는 사이였다. 다카마쓰 씨는 사가의 엄마와 살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마코의 엄마도 함께 살게 되었다. 주변의 소문이 있었지만 세 사람이 그런 식으로 얽히고설킨 사이는 아니었다.
“사가의 손이 내 몸을 더듬으면, 내 손이 내 몸을 더듬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어디까지가 사가이고 어디부터가 나인지 모른다. 너무도 오래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p.97)
그리고 이들은 애리조나의 세도나로 함께 떠나 그곳에서 일하며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다카마쓰 씨가 병이 악화되어 위독해질 무렵 사가의 엄마도 암이 재발되어 가망이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다카마쓰 씨가 죽던 날, 사가의 엄마도 목숨을 끊는다. 마코의 엄마는 이후 자신의 딸인 마코와 사가를 함께 키우지만 마코와 사가가 십 대가 되어 갈 무렵, 마코와 사가를 일본으로 돌려보낼 돈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마치 무언가가 발효해서 모습이 바뀌듯, 지금까지의 생명이 조금씩 다른 생명으로 변해 간다. 같은 맴버, 같은 슬픔, 그런데도 썩지 않고 생명의 소리를 내면서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그런 순간을 나는 깊은 밤의 좁은 그 방에서 매트리스에 기대어, 짙고 옅은 아름다운 초록에 둘러싸여 확실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p.225)
일본에서도 마코와 사가는 멀지 않은 곳에서 생활하였다. 마코는 대학생이고 사가는 빵을 배우는 중이고 사가는 마코보다 두 살이 어리다. 두 사람은 섹스를 하고, 마코는 임신을 하고 싶지만 지금까지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결국 《새들》은 마코와 사가라는 두 인물의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맡든 이들의 부모님의 역사, 그리고 그 캐릭터가 만들어가는 이런 저런 일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그리고 예전과는 달리 요시모토 바나나의 이런 유별난 캐릭터가 식상하다.
요시모토 바나나 / 김난주 역 / 새들 / 민음사 / 232쪽 / 2021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