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유산의 이용 방법은 독자 개개인의 몫으로 남기는...
윤덕영은 대표적인 친일파 중의 하나이다. 그는 경술국치라고도 불리는 한일병합조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애를 쓴 인물이고, 이 공을 인정받아 일본으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한일병합조약 당시 조카딸이 손종의 두 번째 부인인 순종효황후였는데, 황후가 치마폭에 숨긴 옥새를 그가 빼앗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는 1940년에 죽었고, 소설 《영원한 유산》은 1966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적은 언제나 뻔뻔하다. 잘못을 뉘우치는 법은 결코 없다. 윤원섭처럼 뻔뻔한 적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득을 취한 것으로도 모자라 커다란 명예마저 챙기려 한다... 그런 적의 형태는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적의敵意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적들은 마지막 시험과도 같이 유산遺産을 남기고 떠난다. 적이 남긴 유산, 적산敵産,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적과 함께 말살해야 할 폐해인가, 남기고 지켜야 할 공동의 자산인가.” (pp.278~279, <작가의 말> 중)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는 소설의 발아는 한 장의 사진으로 비롯된다. 어린 작가가 할미의 품에 안겨 있는데 그 뒤로 유럽식의 뾰족한 탑이 남아 있는 큰 건축물이 보인다. 작가의 눈에 사진 속 건물이 눈에 들어온 것이 2012년의 일이고, 그것이 당대에 ‘한양의 아방궁’이라고 불리었던 ‘벽수산장’의 남겨진 한 켠이라는 사실, 이후 언커크 (UNCURK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본부 건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모는 온몸에서 물기가 다 빠져나간 고목처럼 파삭파삭했다. 죽은 막냇동생 이야기를 할 때에도 물기 없이 덤덤했다. 하지만 해동은 아버지가 옥에서 나올 때, 죽을 때, 애간장이 녹도록 울던 고모를 눈으로 본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아왔다. 고모의 무표정은 그런 것들이 다 녹아 있는 것이었다. 하염없이 울고, 시도 때도 없이 울고, 멍하니 넋이 나가고, 오랜 시간 멍했던 것들이 다 지나간 뒤에 찾아온 굳은살 같은 얼굴이었다.” (p.58)
2012년에서 8년이 더 흘러, 작가는 윤덕영의 딸인 윤원섭, 언커크에 파견되어 활동하는 오스트레일리아 대표 애커넌 씨, 애커넌 씨의 통역을 담당하는 청년 이해동이라는 세 명의 인물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지금은 언커크의 건물이 되어 있는 벽수산장에서 만나게 되는데, 각자의 처한 바에 따라 서로 다른 비중으로 그곳을 차지하고자 한다. 특히나 윤원섭이 보이는 행태가 그악스럽다.
“... 운원섭의 정신세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명문가라는 자부심이나 저택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뜻밖으로 지방 출신에 대한 경멸이었다... 그녀의 세계관에서는 태조 이성계에서 시작된 조선 왕가 전체가 함흥 출신 촌놈 집단이었고, 그들은 상경한 지 오백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촌놈들이었다. 그에 비하면 그녀의 아버지 윤덕영은 쓴웃음을 머금고 군주 일가의 촌스러움을 참아낸 진짜 귀족으로 묘사되었다.” (p.114)
친일파의 딸이라는 처지에 아랑곳하지 않는 윤원섭은 벽수산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점을 반전의 기회로 삼아 애커넌 씨를 회유한다. 자신의 아비를 옹호하는데 공을 들인 저택 홍보 책자를 만들고 보수 공사를 위한 자금을 따내기에 이른다. 고모로부터 제 아비가 독립 운동을 거들었다는 이유로 몰매를 맞고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해동은 그런 윤원섭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제 역할에 자괴감을 느낀다.
“저택은 아름다웠다. 그것을 소리내어 말하기가 그렇게 고통스러웠다. 스스로 벼락이라도 때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말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윤덕영의 썩은 정신과 나라를 팔아먹은 자금으로 만들었는데도, 저택은 아름다웠다... 아무도 모르는 다락방에 숨어서 난폭한 형제들의 손찌검과 몰락해가는 일가의 앞날을 두려워하던 소녀의 눈물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 소녀는 추해져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저택은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p.252)
이해동이 사직서를 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수공사 중 벽수산장이라고 불리었던 건물, 이제는 언커크의 본부 건물에 불이난다. 그것이 1966년의 일이다. 소설은 거기에서 끝이 나지만 실제 벽수산장 건물은 1973년 도로정비 때 완전히 철거되었다. 지금은 그곳에 그러한 건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자잘한 흔적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러한 흔적들을 뒤져 《영원한 유산》이라는 또 다른 ‘유산’을 만들었다. 그 유산의 이용 방법은 독자 개개인의 몫이다.
심윤경 / 영원한 유산 / 문학동네 / 281쪽 / 2021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