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라고 생각하며...
제인이라는 도시에 R은 아내와 함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내가 사라졌다. 그 전날 R은 아내와 함께 횟집에 들렀는데 그곳 주방에는 아내의 동창이 있었고 아내는 동창과 속삭였다 마치 전에 그런 적이 있는 것 같다고 R은 생각했다. 횟집에서 나와 바닷가를 거닐었고 나는 잠든 것인지도 모른 채로 어느 순간 깨어났고 더 이상 아내가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제인호수에 몸을 던지는 이유는, 그게 하나의 유행이기 때문이라고, R은 생각했다. 충분히 깊고 아름답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끌리고, 아름다움을 참지 못한다. 그저 삼켜지는 아름다움은 없다. 기어이 감탄을 뱉는다. 회자되고 회자되어 누군가의 귀까지 들려오는 소문이 된다. 유행이 된다. 오 나도 꼭 거기서 죽어야지. 누구나 한 번쯤 결심하는 날이 있다.” (p.23)
제인에서 아내가 동창을 만난 것을 보면 제인은 아내와 더 연관이 있는 곳일 것이다. 그곳에는 호수가 있고 바다가 있고 횟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실의 강릉을 퍼뜩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R이 그저 R이고 아내가 아내인 것처럼 굳이 고유한 이름을 가진 장소로 격상될 필요가 없다. 작가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한 바램, 그러니까 바라지 않는다는 바램을 아래의 문단에서 한 번 더 확인한다.
“R이 모텔 안으로 들어갔을 때 키 크고 멀끔한 젊은 남자가 샹들리에 아래에서 바닥을 쓸고 있었다. 천장에서 작은 크리스털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바닥에 깔린 큰 대리석이 깨끗했다. R이 입은 것과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R은 얼굴의 물기를 한 손으로 훑어 닦았다.” (p.48)
작가는 사라진 아내를 두고 (그런데 사라진 아내는 어디에 둘 수 있을까, 사라졌으므로 어디에 둘 수도 없겠지.) 모텔에 들어가는데 위의 문단은 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 중간에 ‘R이 입은 것’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독자인 나는 몇 번이고 위의 문단을 읽는다. ‘입은 것’이라, ‘입은 것’이라, 작가는 왜 ‘입은 것’이라고 표현해야 했을까, 그러니까 도대체 왜...
“아직 소설의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지, 이 글이라고 불러야 할지, 이 미친, 이라고 불러야 할지. 나는 이제 너를 모르겠어. 프린트해놓은 이 소설 이 글 이 미친을 내려다본다...” (p.151)
그러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라고 생각하고 만다. 그러지 않으면 읽기를 이어갈 수 없다. 《겨울장면》은 ‘겨울장면’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서른 개의 장면에 다름 아니다. 소설이긴 하지만 소설이라고 부르길 망설이게 되는 지점도 있다. 《겨울장면》에는 ‘에세이―몇 하루’라는 제목을 따로 붙인 부분이 책의 말미에 붙어 있는데, 작가는 거기에서 자신의 글을 가리켜 ‘이 소설 이 글 이 미친’ 이라고 호명한다.
“글을 쓸 때는 더 많은 위로가 필요하다.
글을 쓸 때 더 많은 양해를 구한다.
글을 쓸 때 자주 냉동고에 얼음을 얼리고.
글을 쓸 때 얼음호수가 필요하다.
글을 쓸 때 다채로운 모습의 해변이 필요하다.
글을 쓸 때 또 다른 창이 필요하다.
글을 쓸 때 또 다른 창을 내다보는 또 다른 내 눈이 필요하고, 물론 또 다른 눈을 달고 있을 또 다른 나의 머리통이 필요하다.
글을 쓸 때 열 손가락을 다 쓰는 것은 아니다...” (p.155)
소설에는 R과 R의 아내 외에 아내의 동창과 그 여자가 잠시 등장한다. 이외에 L이라는 인물이 잠시 거론되는데, ‘L의 장례식’이라는 표현 속에서만 등장한다. L에 대해 다른 정보는 더 이상 없다. 소설은 몇 가지 겹쳐지는 이미지와 극소수의 등장인물로만 이루어져 있다. 큰 따옴표로 묶인 대화도 없고, 줄바꿈이 수시로 이루어진다. 나는 《겨울장면》이 굉장히 미니멀한 (미니멀하고자 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김엄지 / 겨울장면 / 작가정신 / 174쪽 / 2021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