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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7시간전

허수경《오늘의 착각》

유동적이고 그래서 불안한 현재를 이겨내기 위하여...

  《오늘의 착각》은 2018년 세상을 떠난 허수경 시인의 유고 산문집이다. <물고기 모빌, 혹은 화어花魚>를 시작으로 <김행숙과 하이네의 착각, 혹은 다람쥐의 착각>, <미스터 크로우와 오디세이의 착각>, <오래된 푸른 줄의 원고지, 혹은 딸기 넝쿨에 대한 착각>, <착가의 저 너머>를 비롯해 모두 여덟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시 전문 계간지인 <발견>에 실렸던 글들로 2014년부터 2016년에 걸쳐 씌어졌다. 


  “... 착각은 우리 앞에 옆에 뒤에 그리고 언제나 있다. 방향을 가리키는 전치사와 후치사 사이에 삶은 있다가 간다. 방향을 잃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착각은 또한 시인이 이 지상에 개점한 여관에 든 최초의 손님들 가운데 하나이다. 시인의 영혼에게 가장 많은 잔심부름을 시키는 이 손님을 시인은 내몰 수가 없다. 잔심부름의 대가로 시인이 얻는/잃는 것이 너무나 많기에. 시인은 이 공존을 이미 받아들였다. 착각은 발칙하게도 시인이 이 지상에 차린 여관에 손님으로 와서는 어느 사이 여관 이름마저 ‘착각’이라고 개명해버렸다. 아주 오래된 일이다.” (pp.4~5)


  일정한 주제나 형식에 얽매인 글들은 아닌데, 시인은 ‘착각’이라는 키워드를 각각의 글들의 어딘가에 숨겨 놓고 있다. 대놓고 보이도록 한 것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일종의 보물찾기 같은 것이다, 라고 하면 좋겠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책에 실린 산문을 읽는 일이 마냥 수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애써 ‘착각’이라는 키워드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 때 혹여 이것이 착각은 아닌지 다시 한 번 골똘해야 한다.


  “... 젖먹이가 옹알거리듯 잦아들고 있는 저녁빛 속, 묘지터는 죽은 자도 떠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죽은 자를 다른 곳으로 보낸 이들은 산 자일 것이다. 그 산 자들의 오열이 사라진 고요 뒤에 느린 걸음걸이의 산책지가 생겨난다. 그 자리에는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노인, 한구석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는 여자, 자전거 타는 연습을 하고 있는 아이, 줄줄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둘이서 번갈아가며 애달프게도 핥고 있는 연인이 있었다...” (p.11)


  독일의 뮌스터에서 저 멀리 떨어진, 태생의 언어로 작성한 시인의 글들을 읽는 일은 이런저런 이유로 애달프기도 하다. 시인이 구사하는 시의 언어는 처음에 총명하고 맑았으며 재기가 넘쳤다. 시인이 쓰는 산문의 언어는 나중에 접했는데 어느새 기울어감 혹은 저물어감이 짙게 배어 있는 부분이 있어 당혹스러웠다. 시인이 공부하였다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가지는 시간의 역전을 잠시 떠올렸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났던 계절의 열매는 밭딸기라고 했다. 독일로 와서 마당이 있는 집에 살면서 딸기를 심은 적이 있다. 하얀 꽃이 피고 떨어질 즈음 딸기의 멍울은 달렸다. 하얀, 아직 붉음을 입지 못한 여린 열매는 단단하게 성나 있었다. 그 흰 멍울을 따다 입에 넣으면 쓴 비린 신 몸이 쑥, 위장으로 들어왔다. 딸기의 여린 몽울은 인간의 위에서 쓴맛으로 위장을 괴롭혔다. 쓴 신맛은 적어도 나에게는 이 계절을 여는 자연의 첫 타격이었다. 쓴맛은 겨울이 지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세계를 장악하는 계절에 대한 무언의 항의였다.” (pp.70~71)


  시인은 ‘어떤 시들은 시공이 없는 곳에서 발생하고 또한 시공 없이 살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읽는 자의 마음에 의해 천 번도 다른 해석이 가능한 시간을 살아왔고 살아간다.’라고 하는데 시인의 시와 산문이 그렇다. 얼마 전에 시인의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를 다시 구매했다. 내 기억의 책장 어딘가에는 있어야 마땅한데, 도무지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정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믿고 있는 많은 것은 어쩌면 우리 몸이라는 ‘물질’의 비균형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어쩌면 이런 생각도 착각의 산물이기도 하다.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 앞에 서 있는 불안.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설명하고 난 뒤에야 안심이 되는 세계. 꽃이 왜 예쁜지에 대해서 시인의 언어보다는 식물학자의 설명이 더 납득되는 이 논리적인 세계 앞에서 무작정 항복하는 것. 그런데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설명할 수 없는 것 그 너머에는? 그 너머에서 존재의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 시가 아닐까. 논리로 설명되는 세계의 불완전함을 절망하는 것이 시가 아닐까.” (pp.103~104)


  허물어져가는 논리들과 메말라가는 감성들로 푸석거리는 세상은 자꾸 빈곤해지고 있다. 우리는 그저 어쩔 수 없이 상대적으로만 부유할 뿐이다. 시인의 산문집 중 아직 읽지 않은, 그리고 여전히 구매가 가능한 책을 몇 권 주문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그래서 불안한 현재를 이겨내기 위하여, 나의 감정적인 면 혹은 어두운 벽이 가졌으면 하는 두께에 시인의 책들이 도움이 될 것 같다. 



허수경 / 오늘의 착각 : 허수경 유고 산문 / 난다 / 117쪽 / 20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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