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 한 명 조망하다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러 폭발하듯 뒤섞이는 재미..
『“그래도 여기 있는 이 두 애는 사리 판단을 제대로 하는 것 같아요. 천만다행이죠. 혹시 우리 빅토리아가 이제 갓 열여덟 살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셨나요? 하워드 씨는 그 나이 때 어땠는지 기억하세요? 저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전혀 떠오르는 게 없네요. 그저 또 다른 세상 같아요. 그건 그렇고······ 하워드 씨는 호텔에 묵으실 거죠? 마음 같아선 저희 집에 계시라고 하고 싶지만······”
그제야 하워드는 자신이 예약해 둔 호텔이 떠오르면서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가고 싶어졌다.
“좋은 생각이네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롬도 거기로 데려가실······.”』 (1권, p.113)
제이디 스미스의 소설을 읽다보면 대화를 구성하는 독특한 부분과 마주치곤 한다. 예를 들어 위의 문장과 같은 경우, 하워드가 ‘자신이 예약해 둔 호텔’을 떠올린다는 설명이 있은 이후, 이야기의 상대였던 빅토리아의 엄마 칼린은 ‘좋은 생각’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문장을 발설한다. 그러니까 하워드의 생각과 칼린의 말 사이에는 하워드의 말이 빠져 있다. 독자들은 그러한 생략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읽어야 한다.
『“그 사람이라면 이미 만났어요. 우연히요······ 뭐랄까, 좀 이상했어요······. 지난주 거리에서 마주쳤죠. 칼이라고 했던가······.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만났구나? 어때 보였니? 어머······ 레비, 너구나?”
“어때 보였는지 잘 생각 안 나요. 신상에 대한 얘기를 나누진 않았거든요······. 겉보기엔 건강해 보였어요. 그런데 솔직히 말해 별로더군요. 자기 세계에 푹 빠져 사는 사람 같았거든요. 제 생각에 ‘거리의 시인’이란 건 그저······.”
조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엄마가 막내아들을 맞으러 급하게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레비! 네가 여기에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1권, p.531)
그런가하면 위와 같은 상황 설정도 종종 등장한다. 키키는 지금 조라와 대화를 하는 중이다. 그런데 ‘만났구나? 어때 보였니? 어머······ 레비, 너구나?’라는 대사에는 세 가지 상황이 포함되어 있다. ‘만났구나? 어때 보였니?’는 조라에게 말하는 부분이고, ‘어머’는 혼잣말이며, ‘레비, 너구나?’는 이제 막 등장한 레비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키키의 대화는 조라에게서 레비에게로 그 방향을 바꾼다. 이차원의 텍스트를 삼차원적인 어떤 것으로 조정하는 부분같다. 제이디 스미스의 소설이 지니는 유니크함은 이런 형식의 차원에서도 두드러진다.
“... 지난여름, 제롬은 벨시라는 성을 떼어 버리고 대신 킵스 가의 세계와 그들의 생활 방식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벨시 가의 사람들에게는) 딴 세상 이야기 같은 사업과 돈, 실질적인 정치에 관한 논의를 즐거운 마음으로 경청했다. 평등은 신화 같은 개념이고, 다문화주의는 실체가 없는 환상일 뿐이라는 주장도 묵묵히 듣고 넘겼다. 예술은 신이 소수의 몇몇 대가에게만 하사한 선물이며, 대부분의 문학은 논리가 빈약한 좌파적 이데올로기를 감추기 위한 포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몸서리를 칠 만큼 감격했다...” (1권, p.122)
소설은 킵스 가와 벨시 가라는 두 집안의 엮임을 주요한 설정으로 삼아 진행된다. 두 집안의 대표 주자인 하워드와 몬티는 두 사람 모두 대학 교수인데, 렘브란트를 소재로 삼은 책의 발간을 두고 쌓인 악연을 풀지 못한 상태이다. 몬티의 딸 빅토리아와 하워드의 아들 제롬 사이에 있었던 헤프닝도 두 집안 사이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그런 몬티가 하워드가 재직 중인 미국의 대학으로 오게 되면서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목욕하는 헨드리켸, 1654년... 하워드는 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붉은 얼굴의 네델란드 여인이 하얀 무지 겉옷을 입고 종아리를 물에 담그는 그림이었다. 청중은 여인을 바라보고 하워드를 바라본 뒤 다시 여인을 바라보며 하워드의 해설을 기다렸다. 여인은 부끄러운 듯 한쪽으로 시선을 피한 채 물을 바라본다. 더 깊이 걸어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검은 수면이 여인의 모습을 반사한다. 조심성 많은 사람이라면 수면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므로 당연히 불안을 느낄 것이다. 하워드는 키키를 바라보았다. 잠깐이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자신의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키키가 황급히 고개를 들고는 하워드를 바라보았다. 그가 보기에 그녀의 표정은 결코 냉정한 것 같지 않았다...” (2권, pp. 585~586)
백인 진보주의자인 하워드와 흑인 보수주의자인 몬티는 이제 한 대학 안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경에 이른다. 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물론 인종 문제, 정치 사회 문제에서 사사건건 의견의 불일치를 보이는 두 사람이지만 하워드의 아내 키키는 몬티의 아내 칼린을 종종 찾아간다. 몬티의 딸 빅토리아는 하워드의 수업을 듣고, 하워드의 아내 키키는 나중에 몬티의 강의를 듣기도 한다.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것들······ 소설, 음악, 인물, 그림 등을 기록하고 싶었다.” (2권, p.693, <옮긴이의 말>에 실린 스미스의 말)
자메이카 출신 흑인 엄마와 영국의 백인 아버지라는 서로 다른 모계와 부계의 역사를 지닌 제이디 스미스는 대부분 소설에서 (흑의 쪽으로 무게 추가 기울기는 하지만) 흑백이 뒤섞인 등장인물들을 선보인다. 흑백의 문제를 중심에 놓는 대신, 종교나 과학(《하얀 이빨》의 경우) 혹은 예술과 교육(《온 뷰티》의 경우) 등의 문제를 다룬다. 다만 그러다보면 어쩔 수 없이 흑백의 문제가 딸려 나온다는 식이다. 혈연으로 엉킨 인물 한명 한명을 조명하다가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러서 이들이 폭발하듯 뒤섞임으로써 큰 재미를 준다. 그래서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책을 잡고 있는 시간은 길어지고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는 빨라진다.
제이디 스미스 Zadie Smith / 정회성 역 / 온 뷰티 (ON BEAUTY) / 민음사 / 전2권 (1권 551쪽, 2권 606쪽) / 2017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