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경험한 제약은 이후 어떻게 우리를 증명하게 될 것인지...
*2020년 12월 31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레몽 크노는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60년 11월 24일, 수학자인 프랑수아 르 리오네와 함께 주도하여 ’울리포‘ (잠재문학작업실, Ouvroir de Littérature Potentielle)라는 이름의 모임을 첫 번째로 갖는다. 각종 초현실주의를 집대성한 듯한 울리포에는 조르주 페렉, 이탈로 칼비노, 마르셀 뒤상 등이 가담하였다. 조르주 페렉과 레몽 크노는 하나의 철자(그러니까 가장 흔히 사용되는 e)를 사용하지 않는 글을 썼다. 이러한 글쓰기를 리포그램이라고 부른다.
『출근 시간, S선 버스. 스물여섯 언저리의 남자 하나, 리본 대신 끈이 둘린 말랑말랑한 모자, 누군가 길게 잡아 늘인 것처럼 아주 긴 목. 사람들 내림. 문제의 남자 옆 사람에게 분노 폭발. 누군가 지날 때마다 자기를 떠민다고 옆 사람을 비난. 못돼먹은 투로 투덜거림. 공석을 보자마자, 거기로 튀어감.
두 시간 후, 생라자르역 앞, 로마광장에서 나는 그를 다시 만남. 그는 이렇게 말하는 친구와 함께 있음 : “자네, 외투에 단추 하나 더 다는 게 좋겠어.” 친구는 그에게 자리(앞섶)와 이유를 알려줌.』 (p.11, <약기 略記>)
나는 2020년이 새로운 세기에 찾아든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한 해였다고 생각한다. 2021년도 만만치 않을 것이나 (아직 현실의 백신 주사는 요원한 상태이지만) 초현실주의적인 현실에는 면역이 된 탓에 올해보다 그 느낌은 덜할 것이다. 나는 한 해의 마지막 날에 레몽 크노의 글을 잠시 다시 살피고, 그걸 정리하고 있다. 위의 글은 작가가 《문체 연습》이라는 책을 통해 계속해서 변주해갈 장면을 대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첫 번째 챕터이다.
『자네 외투에 단추 하나 더 다는 게 좋겠네, 그의 친구가 그에게 말하고 있다. 나는 로마광장 한복판에서 그를 만나게 될 터였는데, 어떤 좌석 하나를 향해 탐욕스럽게 돌진하던 그를 떠나온 후의 일이다. 방금 어떤 승객의 밀치기에 항의하고 있던 그에 따르면, 누군가 내릴 때마다 이 승객이 그를 떠밀곤 했다는 것이다. 삐쩍 곯은 이 젊은이는 우스꽝스러운 모자 하나를 쓰고 있던 바로 그 작자였다. 승강대 위, 어떤 S선 만원버스에서, 오늘 정오에 있었던 일이다.』 (p.15, <거꾸로 되감기>)
자가는 이어서 중복하여 말하기, 조심스레, 은유적으로, 거꾸로 되감기 등 스스로 이름을 붙인 그 형태에 따라 같은 장면을 무수히 반복한다. 이러한 변주가 아흔 아홉 번 이어지고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추가편이 있을 정도이다. 아니 뭘 이렇게까지, 라고 쓴웃음이 지어질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변주도 있는데, 이를 한국어로 옮긴 번역가의 노고에 저절로 박수를 보내게 된다.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 드디어 흩어지기 시작하는 시각, 나는 S선 저 구불구불한 노선에 맞서고 있는 암소 눈의 위풍당당한 어느 버스에 쏜살같이 빠른 화살 모양으로 잽싸게 올라타고야 말았다. 전투의 길목 위로 드리운 인디언 전사의 정확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는 어떤 젊은이의 출현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의 목은 다리가 날렵한 기린의 것보다 길었고, 문체 연습 한 편의 주인공이라도 된다는 듯이, 배배 꼰 장식줄을 두른 말랑말랑한 중절몰르 쓰고 있었다. 한가득 그을음에 둘러싸인 불화가 치약의 소멸로 인해 야기된 악취를 팍팍 풍기며 그의 입에서 죽음의 냄새를 연신 풍겼는데, 나는, 저 불화가, 모자 주위로 줄을 두른 기린 모자기의 그 젊은이와 밀가루를 뒤집어쓴 듯 결단력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낯빛의 어떤 승객 사이로 사악한 병균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고 말할 수 있으리라. 젊은이는 승객에게 이런 어휘를 써가며 말을 건넸다. “어이, 못돼먹은 양반, 내 발 일부러 밟은 거 아니라고 어디 한번 씨불여보시기.” 이렇게 말하고는, 기린 목에 모자 주위로 줄을 두른 이 젊은이는 잽싸게 자리에 앉으러 가는 것이었다.
나중에, 장중한 위엄과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로마광장에서, 나는 기린 모가지에 모자 주위로 줄을 두른 젊은이를 다시 알아보았는데, 기린 모가지에 모자 주위로 줄을 두른 이 젊은이는 그가 입고 있는 의복, 저 극단의 외면에다 대고서 “외곽을 원형으로 빙 두른 단추 하나를 추가하거나 상향을 하든지 해서, 앞섶의 각도를 다소 줄이는 게 좋을 걸세”라며, 귀를 쫑긋 세워야만 내게 들려올 수 있었을 비판을 또박또박 발설하던, 그렇게 우아함의 심판관을 자처하는 동료와 동행하고 있었다.』 (pp.56~57, <허세를 떨며>)
그건 그렇고, 다시 한 번 떠올리건대 2020년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선명하게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지불식간에 찾아든 코로나의 형국은 사람들 간의 거리두기를 그야말로 선한 보편의 가치로 만들었다. 우리는 함부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고, 숱한 접촉은 피해야 할 첫 번째 행동이 되었다. 어느 순간 시간을 거꾸로 돌려 2020년의 어느 순간으로 되돌아갈 때 우리는 가장 이상한 우리들을 발견하게 될 것인데, 나는 그러니까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크노의 작품은 에세이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며, 단편 모음집이라고도 할 수 없고, 또한 콩트라고 하기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문학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워진 것도 아니며, 흔히 말하듯, 누보로망의 ‘실험적’ 글쓰기라고 하기에도 뭔가 부족하거나 과도하다고 느껴지며, 아방가르드의 작렬하는 저 파격을 따른다거나 초현실주의자가 쏘아 올린 불꽃을 따라 질주하며 그 화려한 트임을 쫓지도 않는다. 오히려 하나에서 아흔아홉까지 단순하고 질서정연하게 하나씩 늘어선 모양이, 흡사 매번 바뀌는 놀이, 그러니까 매번 다른 규칙을 부여받아 하나씩 풀어내고 푼 다음에, 이어 다음 단계별로 나아가야 하는 놀이와도 일면 닮았다...” (pp.156~157, 역자의 <해제> 중)
2020년은 각종의 제약으로 가득한 한 해였다. 나라 바깥으로 향하는 길은 철저히 막혔고, 이제는 나라 안에서의 이동도 죄악시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울리포의 작가인 레몽 크노나 조르주 페렉은 리포그램이라는 행위로, 제약을 통하여 잠재력을 증명한다는, 울리포 그룹이 지향하는 아이러니를 몸소 보여주었다. 2020년 우리가 경험한 제약이 이후 어떻게 우리를 증명하게 될 것인지 몹시 궁금하고 매우 불안하다.
레몽 크노 Raymond Queneau / 조재룡 역 / 문체 연습 (Exercices de style) / 문학동네 / 342쪽 / 2020 (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