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라인 냅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촘촘히 나뉜 탐닉의 시간들이 들이닥치고 갑자기 사라지던 그때...

by 우주에부는바람

*2020년 12월 24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내 이력은 모범 시민이나 촉망받는 젊은이의 것이지, 술주정뱅이의 것은 아니었다. 교육과 학문의 도시 케임브리지가 고향으로, 집은 하버드 대학 근처다. 학력은 아이비리그의 명문 브라운 대학 81년 졸업으로, 마그나 쿰 파우데(우등졸업)이다. 부모는 저명한 정신분석가 아버지와 예술가 어머니, 두 분 모두 헌신적이며 통찰력과 지성을 고루 갖췄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지?’ ...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은 공기를 묘사하는 것과 비슷할지 모른다. 단정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크고 오묘하고 곳곳에 편재해 있다. 인생의 모든 굽이에 알코올이 있다. 그래서 언제나 그 존재를 느끼면서도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사실은 하나, 알코올이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평범한 술꾼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구체적인 선을 넘어 버리는 것은 어떤 단순한 이유, 어떤 한순간, 어떤 단일한 심리적 사건을 통해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느리고 점진적이며 집요하고도 불가해한 형성의 과정이다.” (p.22)


이십대 중반의 어느 날 새벽이었다. 여름도 겨울도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애인과 (지금의 아내와) 어느 허름한 선술집에 마주 앉아 있었다. 전날 저녁 학교 앞에서 술을 마신 것까지만 기억이 났다. 여기 분위기 이상하네, 학교에서 먼 곳까지 우리가 온 건가? 라고 묻자 애인이 (지금의 아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상하겠죠, 여기 동해예요, 형이 강릉은 죽어도 싫다고 해서 동해역에서 내렸어요. 지금의 아내의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옆 자리에서 들려오는 아저씨들의 말투가 동해안 쪽 사투리구나, 알 것 같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밤에 기차를 타고 다음날 새벽 청량리에 도착했다. 동해에서 기차를 탈 때 RC 유선 탱크 프라모델을 하나 구매했고 올라오는 기차에서 그것을 조립했다. 술은 마시지 않았다. 청량리역의 광장에서 완성된 탱크를 연결된 조종간으로 움직였다. 조금 움직이다가 기우뚱하더니 캐터필러가 풀어져버렸다.


“... 고도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들은 주변에 아주 흔하다. 이들은 직장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식품점 계산대에 얌전히 줄 서 있다. 의사, 변호사, 교사, 정치인, 화가, 심리치료사, 증권거래인, 건축가 등 전문 직업인도 많다. 이들을 지탱하는 힘, 다시 말해서, 이들이 밤마다 술에 빠지고, 다음 날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살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들이 ‘진짜’ 주정뱅이들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p.28)


삼십대 중반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간절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해가 쫘아아악 내리쬐는 강남역 근처 편의점 앞의 파라솔 아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때 역삼역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IT 회사에 다녔고 저녁마다 강남역의 지하 우드(스탁)와 삼층 우드(스탁)를 번갈아 다니며 술을 마셨다. 하루는 지하 우드 하루는 삼층 우드가 아니라 초저녁에는 삼층 우드, 이차로는 지하 우드라는 식이었다. 지하 우드가 문을 닫으면 다시 삼층 우드가 있는 구역으로 넘어가 4X에서 춤을 춘다거나 24시간 해장국집 등에서 마저 술을 마셨다. 그날도 그렇게 마시다가 암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제 퇴근 차림 그대로 편의점 파라솔 아래에서 정신이 든 것이다. 파라솔 옆으로 출근하는 인파가 밀물처럼 몰려왔다. 나는 의자 옆의 가방을 들고 조용히 그 인파에 섞여서 출근을 감행했다.


“AA 모임에 나가면 가장 먼저 듣는, 그리고 가장 먼저 우리 가슴에 사무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알코올 중독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의 인격이 성장을 멈춘다는 것이다. 술은 우리가 성숙한 방식으로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려면 겪어야 하는 힘겨운 인생 경험을 박탈한다. 간편한 변신을 위해 술을 마신다면, 술을 마시고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되다면, 그리고 이런 일을 날마다 반복한다면 우리가 세상에 맺는 관계는 진흙탕처럼 혼탁해지고 만다. 우리는 방향 감각도 잃고 발 딛고 선 땅에 대한 안정감도 잃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기본적 사항들(두려워하는 것, 좋아하는 느낌과 싫어하는 느낌, 마음의 평안을 얻는데 필요한 것)도 알 수 없게 된다. 술에 젖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그것을 찾아 나선 적이 없기 때문이다.” (pp.113~114)


사십대 중반의 어느 날 이른 새벽이었다. 어떤 계절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택시 기사가 묻는 행선지를 대답하지 못해 안절부절 하는 중이었다. 나는 우리 집이 속해 있는 동네 이름을 말하려고 했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택시 기사가 다시 짜증을 내며 어디까지 가시느냐고 물었고 나는 손을 들어 어떤 방향을 가리키려다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택시 기사는 집과 나 사이의 어느 지점에 나를 내팽개쳐졌다. 우리 집이 속해 있는 동네를 닮은 여러 동네를 전전하였다. 불빛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썼고 의문스러운 포장 마차에서 기계 우동을 하나 먹고 다시 택시를 잡아탔고, 그때는 동네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


“... 그냥 전화할 뿐이다. 취했으니 전화하는 것이다. 취했으니 전화기를 찾는다. 취했으니 어떤 인간적 접촉을 갈망하는 것이다... 혼술의 역설은(그러면서 정말로 위험한 것은) 우리가 정서적으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만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혼자 술 마시던 시절, 술이야말로 내 진정한 감정의 문을 열어주는 유일한 도구라고 느꼈다. 술을 마시고 녹아내린다, 술을 마시고 흐느낀다, 술을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 전화 걸어 고통을 호소한다... 하지만 술은 기만의 도구이다. 술이 빚어내는 감정은 환각이다. 다음날이 되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전화를 걸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침에 깨어나면 분명한 사실 하나는 머리가 아프다는 것뿐이다.” (pp.166~167)


캐롤라인 냅의 《드링킹》은 스스로를 고도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술을 마시는 삶의 영역과 타인에게 보여 지는 삶의 영역을 잘 구분하는 덕분에 주변으로부터 알코올 중독자로 치부되는 일을 피할 수 있는 알코올 중독자)로 규정한 작가의 십대에서 삼십대 중반에 걸친 드링킹 생활을 기록한 책이다. 읽고 있으면 모든 구절에서 나를, 내가 술을 마시면서 느꼈던 것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의 드링킹 세월이 작가의 그것보다 길었다는 것이고 작가처럼 완전히 술을 끊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이다.


“... 중독은 매우 복잡한 현상이지만 기본 개념은 명확하다. 즉, 욕망과 보상에 관한 두뇌의 정상적인 시스템이 알코올 탓에 헝클어져서, 행복감을 전해주는 신경 전달 물질과 단백질의 기능이 손상되는 것이다... 음주 행위는 두뇌의 보상 체계를 인위적으로 활성화하는 것이다. 마티니를 한두 잔 마시면, 알코올이 행복감을 전해주는 두뇌 회로 구조에 영향을 미쳐서 도파민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의 분비를 촉진한다. 도파민은 바로 쾌락과 보상 감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세월이 흐르면(그리고 그동안 알코올이 일정 수준 이상 남용되면) 우리 두뇌는 그런 인위적인 활력 증가에 ‘대상성 적응’이라는 것으로 대응한다. 내적 물질 균형을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려고 도파민의 분비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본래의 쾌락과 보상 회로는 고갈된다... 그리고 악순환이 이어진다. 계속해서 술을 마시면 우리 두뇌는 행복감과 안정감을 제공하는 능력이 감퇴하고, 그러다 보면 그런 느낌을 만들려고 점점 더 인위적인 자극(알코올)에 의존하게 된다...” (pp.179~180)


아예 안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음주 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 집에서, 혼자, 소주 다섯 잔과 맥주 두 캔을 마시는 것이 전부이다. 이런 생활이 칠 년 정도 유지되고 있다. 아내는 그마저도 못마땅해 하지만 말리지는 않는다. 예전의 나는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전날 시작하여 성탄절 당일까지 이어갈 수 있는 술자리를 만들거나 찾아갔다. 두려움 없이 마셨을 것이고, 촘촘히 나뉜 탐닉의 시간들이 들이닥치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무연히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지금의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술을 마시는 대신 술에 대해 쓰는 것으로 만족해하고 있다. 그래도 다들 메리 크리스마스...



캐롤라인 냅 Carolline Knapp / 고정아 역 / 드링킹 : 그 치명적 유혹 (Drinking: A Love Story) / 나무처럼 / 383쪽 / 2017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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