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기에 도드라지는 인간사 아이러니의 종합...
”... 드디어 백작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지 않고, 책을 읽는 데 필요한 시간과 고독을 그에게 제공하는 상황이 마련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책을 손에 꼭 들고 한 발을 농의 구석에 댄 채 의자를 뒤로 젖혀서, 의자가 뒷다리 두 개로만 균형을 이룬 기울어진 자세로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p.42)
1922년 6월 21일, 주인공인 로스토프 백작은 자신이 머물고 있던 메트로폴 호텔에 연금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가 서른 두 살이 되던 해였다. 그는 메트로폴 호텔 내부에서는 이동의 제한이 없었지만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호텔을 벗어날 수는 없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그때까지 머물던 스위트룸 317호에서 종탑 근처 6층의 버려진 방들 중 하나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방의 크기는 9제곱미터, 세 평 정도였다.
”... 통제와 관리와 타인의 의도 아래 존재하는 방이 실제보다 더 작아 보인다고 한다면, 비밀리에 존재하는 방은 그 크기와 상관없이 상상하는 만큼 넓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p.105)
로스토프 백작은 그 방에 붙박이로 되어 있는 옷장 너머 벽을 뚫고 또 다른 버려진 방에 자신만의 서재를 꾸미는 것으로 그곳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호텔의 로비와 보야르스키 식당과 피아차 식당 그리고 바 샬랴핀으로 이어지는 자신만의 생활 패턴을 이어가던 어느 날 니나 쿨리코바라는 꼬마 아가씨를 만나게 되고, 이 어린 소녀를 통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호텔의 구석구석을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편리함이라는 게 뭔지 얘기해줄게요... 정오까지 잠을 잔 다음에 누군가를 시켜 쟁반에 받친 아침 식사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 약속 시간 직전에 약속을 취소해버리는 것. 한 파티장의 문 앞에 마차를 대기시킴으로써 얘기만 하면 즉시 다른 파티장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는 것. 젊었을 때 결혼을 피하고 아이 갖기를 미루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최고의 편리함이에요, 안나. 한때 난 그 모든 걸 누렸었죠. 그런데; 결국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불편함이었어요.“ (p.555)
처음 로스토프 백작이 낙관적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어느 시점에 자살을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호텔 지붕의 난간에서 몸을 던지기 직전, 자신의 고향에 다녀온 벌들이 만든 꿀의 맛을 본 이후 그는 살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1938년, 그러니까 그의 연금 생활이 시작된 1922년에서 16년이 지난 시점은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그 해에 로스토프 백작은 어린 소녀였던 니나의 딸 소피야를 맡아서 키우기 시작했다.
”내겐 너를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단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음악원 경연 대회가 열렸던 밤이었어. 하지만 정작 내가 최고의 자부심을 느낀 순간은 안나와 네가 우승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가 아니야. 그것은 바로 그날 저녁, 경연을 몇 시간 앞두고 네가 경연장으로 가기 위해 호텔 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박수 갈채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환호를 받게 될 것인지의 여부가 불확실함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이란다.“ (p.609)
곧 돌아온다던 니나는 그후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백작은 이제 자신이 이용하던 식당에서 웨이터 주임으로 일하며 주방장인 에밀, 지배인인 안드레이와 매일 삼인 회의를 진행한다. 소피야는 너무 잘 자라주었고 백작을 아빠라고 부른다. 백작이 모르는 사이에 피아노를 배웠고 천부적인 자질로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1938년에서 다시 16년이 지난 1954년에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프랑스로 연주 여행을 떠나게 된다.
”돌이켜보면 역사의 모든 전기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하지만 그 말이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놓은 나폴레옹 같은 사람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야.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사람은 예술이나 상업, 또는 사고의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갈림길마다 매번 등장하는 나자와 여자들이야. 마치 ’삶‘이란 것이 그 자체의 목적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받을 요량으로 때때로 그들을 불러낸 것처럼 말이지. 소피야, 내가 세상에서 태어난 후 이제까지 인생이 나로 하여금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 있게 한 것은 딱 한 번뿐이었어. 바로 네 엄마가 너를 이 호텔 로비로 데려온 날이란다. 그 시간에 내가 이 호텔에 있었던 것 대신에 러시아 전체를 통치하는 차르 자리를 내게 준다 해도 난 절대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pp.656~657)
소설은 볼셰비키 혁명 즈음의 러시아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삼지만 그것을 본격적인 풍경으로 삼지는 않는다. 소설은 그러한 혁명기에 보다 뚜렷해질 수 있는 인간사의 아이러니를 다룬다. 그래서 ”그 옛날 너에게 평생 매트로폴을 떠날 수 없다는 연금형이 선고되었을 때, 네가 러시아 최고의 행운아가 되리라는 걸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라는 백작의 친구 미사카의 말이야말로 소설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 1922년에서 1954년까지 32년 동안의 세월을 배경으로 삼은 이 작품은 1922년 6월 21일을 시작으로 장이 바뀔 때마다 시간이 2배 정도의 빠르기로 흘러간다. 그러니까 백작의 연금이 시작된 6월 21일, 그 하루 뒤, 그 이틀 뒤, 5일 뒤, 10일 뒤, 3주 뒤, 6주 뒤, 3개월 뒤, 6개월 뒤, 1년 뒤, 2년 뒤, 4년 뒤, 8년 뒤, 16년 뒤의 하루를 다루고 있는데, 16년 뒤인 1938년을 기점으로는 시간의 빠르기가 절반으로 줄어들며 진행된다. 즉 장이 바뀌면 8년, 4년, 2년, 1년, 6개월, 3개월, 6주, 3주, 10일, 5일, 이틀의 시간이 흘러가 있고, 이어 다음 날인 1954년 6월 21일을 끝으로 소설의 막이 내리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도 초기의 일어난 일과 최근의 일들은 선명히, 시시콜콜히 기억나지만 중간에 있었던 일들은 기억에서 뭉텅뭉텅 잘려 나가는 경우가 보통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같은 시간적 구성은 우리의 직관과도 잘 어울린다.” (p.720, 옮긴이의 말 중)
로스토프를 걱정하던 친구는 반대로 백작을 부러워하게 되고, 당의 간부인 오시프는 지나간 구시대의 로스토프 백작을 통해 서구의 매너를 배운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니나는 호텔을 벗어날 수 없는 로스토프에게 소피야를 맡기고, 로스토프는 소피야를 훨훨 날아갈 수있도록 키워낸다. 소설은 뛰어난 대중성으로 무장한 채 일말의 문학성을 가미하고 있다. 미스터리 장르로 구분해도 좋을 만큼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오차를 생각할 틈도 없을 만큼 깔끔하다.
에이모 토울스 Amor Towles / 서창렬 역 / 모스크바의 신사 (A Gentleman in Moscow) / 현대문학 / 723쪽 / 2018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