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모 토울스《우아한 연인》

순수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완벽하게 예의바른 팅커를 닮은 소설이랄까...

by 우주에부는바람

작가의 이력이 꽤 흥미로웠다. 예일 대학교와 스탠퍼드 대학교를 거쳐 석사 학위로 쓴 단편 소설 <기쁨의 유혹>이 잡지 <파리 리뷰>에 실렸지만 그는 작가의 길을 걷는 대신 이후 투자 전문가로 20년을 살았다. 그리고 2011년에 이 작품 《우아한 여인》을 출간했다. 40대 후반의 나이였다. 데뷔작이었으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후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되지만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5년이 (1년의 독서시간과 4년의 집필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필요한 작가는 《우아한 여인》 이후 2016년 《모스크바의 신사》라는 책을 한 권 더 출간했을 뿐이다. 이 작품은 전작보다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뒀고 지금은 세 번째 소설을 집필 중이다.


“이브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타고난 금발이었다. 어깨까지 기른 머리카락이 여름에는 모래 빛깔이었다가 가을이 되면 황금색으로 변했다. 마치 고향의 밀밭에 공명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목구비는 섬세했고, 핀으로 찍어놓은 듯한 보조개와 푸른 눈은 아주 완벽해서 마치 양쪽 뺨 안쪽에 매어둔 작은 강철 케이블이 이브가 웃을 때마다 팽팽하게 뺨을 잡아당겨 보조개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이브의 키가 겨우 163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브는 5센티미터 굽의 하이힐을 신고 춤추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남의무릎에 앉자마자 하이힐을 차듯이 벗어버리는 법 또한 알고 있었다.” (pp.28~29)


소설을 읽는 순간 문학적이기보다는 영화적이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인물이나 공간에 대한 어떤 묘사는 그대로 시나리오의 한 페이지로 삼아도 좋았겠다고 여기게 된다. 기억을 잘 뒤져본다면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어느 헐리우드 영화에선가 소설 속의 여인을 혹은 소설의 속의 신사를 끄집어낼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있다. 문학을 흉내 낸 영화를 다시 흉내 낸 문학이란 것이 있다면 이렇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된다.


“그동안 나는 5천 쪽 분량의 구술을 받아 적었다. 그리고 날씨만큼이나 우중충한 문장으로 된 글을 40만 단어 분량이나 타자로 쳤다. 나는 내가 가진 최고의 플란넬 스커트가 닳도록 앉아서 갈라진 부정사들을 봉합하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수식어구들을 끌어올렸다. 밤이면 내 집 부엌 식탁에 혼자 앉아 땅콩버터를 바른 토스트를 먹으며 카드놀이의 도사가 되었다...” (p.132)


나는 (애매하긴 하지만) 좀더 문학적인 묘사를 선호하나 보다. 이 작가의 문장은 읽는 동안 자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나는 문장을 손아귀에 꼭 쥔 채 소설을 읽고 싶다. 내 손아귀에 꽉 붙잡힌 채로 숨도 쉬지 못하는 문장, 아니 반대로 문장에 사로잡혀 숨도 쉬지 못하는 나를 경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기에 작가의 문장은 너무 반짝이고 윤기가 흐른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 카멜레온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진부한 표현이다. 환경에 따라 색깔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1백만 명 중 한 명도 안 된다. 반면 나비 같은 사람은 수만 명이나 된다. 이브처럼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색깔을 지닌 사람들. 한 색깔은 매력을 발산하고, 다른 색깔은 자신을 감춰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날개를 가볍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색깔을 바꿀 수 있다.” (p.193)


순간순간 재기가 넘치는, 굉장히 똑똑한 대화들도 넘쳐난다. 당대의 힙스터들이 나누는 대화들로 그럴싸하다. 작가의 긴 집필 시간에 그럴 만도 하다고 고개 끄덕이게 되는 대목들이 수두룩하다. 이 대화들 또한 지금 당장 헐리우드 영화의 타이밍 좋게, 치고받는 대사로 사용되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끔함이 오히려 마음에 걸린다. 이 심통의 근원을 알 수 없어 답답하다.


“... 아버지는 살면서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아무리 풀이 죽고 기운이 빠져도, 자신이 언제나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처음 커피를 마시는 순간을 고대하는 한은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타협을 모르고 목표를 추구하는 자세와 영원한 진리를 향한 탐구는 고귀한 이상을 지닌 젊은이들에게 확실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사람이 일상적인 것, 그러니까 현관 앞 계단에서 피우는 담배나 욕조에 몸을 담그고 먹는 생강 쿠키의 즐거움과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십중팔구 쓸데없는 위험 속에 몸을 담갔다고 보면 된다. 그때 아버지가 당신 인생의 결말을 앞두고 내게 말하려고 했던 것은, 이 위험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반드시 소박한 즐거움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아함이나 박학다식처럼 온갖 화려한 유혹들에 맞서서 소박한 즐거움을 지켜야 한다.” (p.209)


소설은 1938년이라는 시간을 나에게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준 네 명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1966년이라는 현 시점에서 나는 사진전에 들렀다가 이 중 한 인물의 사진을 발견했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그 시절을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이브, 팅커, 월러스, 디키이고 사진전에서 발견된 것은 팅커이다. 팅커는 나의 룸메이트였던 이브와 결혼 직전까지 갔던 인물이고, 어쩌면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1938년은 굉장한 색채와 특징을 지는 네 사람이 내 삶을 기분 좋게 지배한 해였다. 그리고 오늘은 1940년 12월 31일이다. 나는 그 네 사람을 모두 1년 넘게 만나지 못했다.” (p.507)


소설 속에서 팅커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고, 그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청년의 모습과 성공을 위하여 나이든 여인과 관계를 맺는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케이티는 두 번째 모습 때문에 그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가 결국 다시 돌아가고자 한 첫 번째 모습을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어쩌면 소설을 향한 나의 심통은 팅커의 두 번째 모습을 소설가에게서 발견한 탓은 아닐까 싶다. 그때 팅커는 순수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완벽하게 예의바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와 이브에게...



에이모 토울스 Amor Towles / 김승욱 역 / 우아한 연인 (Rules of Civility) / 현대문학 / 538쪽 / 202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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