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 《0 영 ZERO 零》

아무런 대가도 원하지 않는 듯한 파멸로의 길 안내...

by 우주에부는바람

“나는 약 1초가량 그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고, 즉시 그가 시선의 출처인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성연우에게로 돌렸다. 그는 계속해서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롱코트 남자는 주문을 마친 뒤 나와 성연우에게서 멀리 떨어진 자리, 하지만 우리를 여유롭게 관망하기에 가장 적합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pp.14~15)


소설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 장면으로 주인공의 캐릭터에 강하게 밀착할 수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연애 상대인 이성과 만나게 되는,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만남의 순간에 나는 그에게 집중하지 못한다, 아니 집중하지 않는다. 나는 그 장면의 주인공일 수는 있지만 그 관계의 주인공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나는 그 남자를 찰 수도 있지만 그 남자에게 차일 수도 있는데, 그 결정권은 언제나 내게 있다.


“개강을 일주일 앞두고 나는 내 완벽하게 다정한 남자친구1과 헤어졌다. 내 인생 첫 번째 남자 친구. 나는 그를 사랑했던가? 아니. 조금도? 조금도. 단 1초도? 단 1초도 나는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갖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그는 다정한 유령이었다. 다정하고 또 다정한, 흰 리넨커튼 사이로 흐릿하게 모습을 비추는 다정한 유령.” (p.45)


남자와의 관계에서 갖는 나의 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남자친구1이라고 호명하는 그를 나는 ’다정한 유령‘이라고 명명한다. 나에게 남자친구는 실체를 갖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존재이다. 기껏해야 그가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윤곽은 ’다정한 유령‘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나의 관계 맺기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그것은 남자와의 관계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인간들과의 관계 맺음에서 나는 그렇다.


“재능을 가진 인간들의 가장 큰 약점은 허영심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재능만큼, 딱 그만큼의 거품에 둘러싸여 있다. 그 거품, 즉 허영심은 재능의 부산물이자 함정. 허영심은 눈을 멀게 하고, 신경을 둔하게 한다. 한마디로 마비시키는 쾌락이다. 재능을 가진 인간들은 쾌락에 취약하다. 하여 그들은 뻔히 두 눈을 뜬 채 꼬임에 넘어간다. 박세영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허여심은 번번이 그 애의 재능을 이겼다. 결국 그녀의 재능은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었다.” (p.70)


소설에 등장하는 박세영은 아직 어린 성인이고 나의 제자였지만 나는 그녀 또한 파괴한다. ’아름다운 종달새가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광경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라고 말하는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 것일까? 내가 가지고 있는 악마성은 관계의 파탄으로 증명된다. 나는 따로 계획이랄 것도 없는 (아마도 계획된) 감정으로 상대를 대한다. 그런 나에게 상대방들은 대부분 무력하다.


“도시에서 가장 쉽고 싸고 안전한 것이 무엇일까? 전기? 물? 택시? 아니, 인간이다. 도시는 인간들로 가득하다고 분명히 말했다. 인간이란 아주 신기한 동물이라서 여러 가지에 쓰일 수가 있다. 여러 가지를 하는 데에 대단히 유용하다...” (p.100)


어쩌면 도시에 가장 흔한 것이 인간이기에 나는 인간을 상대로 이러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억지로 그 기원을 찾자면 독일에서 내가 만난 크리스티나라는 소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때까지 모든 시선을 모을 수 있었던 나로부터 반 아이들의 시선을 빼앗아간 소녀. 나는 그 소녀를 통해 세상의 진리를 깨닫고, 현재 이곳에서도 그 진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겼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계속된 나의 승리에 마녀 크리스티나가 큰 역할을 했음을 인정한다. 그녀가 나에게 가르쳐준 단순한 진리. 세상은 잡아먹는 인간들과 잡아먹히는 인간들 두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그 진리를 충실히 따르는 것을 통하여 나는 학살의 현장들에서 매번 살아남았다...” (p.186)


그리고 더욱 아찔한 것은 내가 그러한 결과에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0 영 ZERO 零‘이라는 제목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인공인 나의 아무런 대가도 원하지 않는 듯한 파멸로의 길 안내는 섬뜩하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드러내는 것처럼, 우리가 이루어내야 하는 삶이라는 것도 내가 그 생애 동안 인식해야 하는 세상도 그저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김사과 / 0 영 ZERO 零 / 작가정신 / 223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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