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주 《숨》

소설은 재촉된 쓰는 일과 명령된 쓰지 말라는 속엣말 사이...

by 우주에부는바람

문장이 문장으로 이어진다. 단어가 단어로 이어진다. 이렇게 계속해서 이어가지 않으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멈추게 된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이어가야 한다. 언제부터 이러한 이어짐이 시작되었는지 물을 필요도 없다. 너는 언제 시작되었느냐는 물음처럼 의미가 없는 일이다.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그 시작이 아니라 그 끝일 뿐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이다. 다만 그 죽음의 형태가 무엇이냐만 미정이다.


“... (쓰지 마라)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 자살하면 쓰지 않아도 되겠지, 아무것도. 자살하면 읽지 않아도 되겠지, 아무것도. 자살하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아무 말도. 자살하면 보지 않아도 되겠지, 모든 것들을. 더는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우습게도 이렇게 된 것이다. 내가 매일같이 자살을 생각하는 이유를 먼저 밝혀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지금, 그러니까 지금, 쓰고 읽고 말하고 보는 지금, 나는 이 글을 끝내지 않는 한 계속해서 자살을, 혹은 자살에 대한 생각을 미룰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써야 한다.” (p.9)


소설은 중간중간 괄호 안에 갇힌 ’쓰지 마라‘라는 구호가 등장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구호이지만 괄호 안에 갇혀 있으므로 실체가 없는 구호이기도 하다. 그것은 속엣말이기도 하고, ’쓰지 마라‘는 결국 ’죽어야 한다‘는 다짐 같은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다짐은 괄호 안에 갇혀 있고, 괄호 바깥의 나는 어떻게든 쓰려고 한다. 쓰는 일만이 죽음이라는 나의 다짐을 유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쓰지 마라) 나는 몇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자살을 생각했다. 한동안은 죽음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죽음의 자리에 자살이 들어섰다, 몇 년 전에. 친구의 장례식에서였다. 친구는 목을 매 죽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다. 나는 그가 자살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나을 것이다. 도망칠까, 그러나 도망칠 곳이 없다. 이미 도망쳤기 때문이다.” (p.45)


소설은 그렇게 쓰는 일과 쓰지 않는 일 사이의 투쟁 같은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가는 일과 어떻게든 살아도 결국은 죽는 일 사이의 투쟁 같은 것이기도 하다. 작가의 소설이 그렇기도 하고 원래 소설이란 것이 그렇기도 하다. 그렇게 소설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나와 쓰는 내가 있고, 목을 매 자살한 친구가 있고, 길에서 마주친 죽은 비둘기가 있고, 개가 있고, 사랑한 걔도 있다.


“... 자동차 사고로 죽을 확률은 십만 분의 일, 비행기 사고로 죽을 확률은 사백만 분의 일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후로 나는 운전을 할 때마다 이미 죽어버린 내 몸의 십만 분의 일을 생각했어, 비행기를 탈 때마다 이미 죽어버린 내 몸의 사백만 분의 일을 생각했다. 십만 분의 일씩 십만 번 죽으면 나의 죽음이 완전해지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새벽이면 가끔 텅 빈 도로를 달리고 싶어졌어, 그렇게 몇 번이고 십만 번의 일씩 더했다. 엉터리 산수였다...” (p.61)


소설에는 어떻게든 죽음을 유예시키려는 내가 있다. 나는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죽음을 유예시킬 수 있다. 나의 죽음은 내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그만두는 순간 구체적인 것이 될 것이다. 게다가 내게 가능한 죽음은 지금으로서는 자살인데, 나는 자살을 할 생각이 없으므로, 지금 내게는 죽음이 가능하지 않다. 나는 죽음이 가능하지 않다는 이야기까지 쓴다. 내가 호명됨으로써 죽음은 실체를 띠고, 나로부터는 멀어진다.


“... 나는 걔에게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걔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아무 책이나 꺼내 읽는 시늉을 하거나 책들을 가나다순으로 다시 꽂거나 크기별로 재배치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정도와 빈도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자살 가능성이 남아 있었고 여전히 딱히 자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자살한 뒤가 궁금했다. 사랑하던 개가 죽은 뒤에 나는 대상이 사라진 사랑을 어떻게 종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죽으면 두 개의 사랑을 쉽게 종료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구체적으로 자살을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었고 따라서 죽음은 늘 추상적이었다. 그리고 이제 사랑 역시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지지 않을 것이며 언제까지고 차가운 추상으로만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토록 무력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 죽음을 그만 생각할 때라고, 그만 반복할 때라고 생각하면서도 사랑을 이야기할 때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pp.105~106)


소설은 삶과 죽음의 거듭되는 이율배반에 갇혀 있다. 소설은 재촉된 쓰는 일과 명령된 쓰지 말라는 속엣말 사이에 있기도 하다. 문장으로 죽여주는 작가가 죽음의 문장으로 소설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어지고 있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문단도 나누기 싫다는 제스처로 가득하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소설을 끝까지 읽었다. 소설을 끝까지 읽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유주 / 숨 / 문학실험실 / 124쪽 / 20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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