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나와 결별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필사의 부림...
연작소설집이라기 보다는 여섯 개의 챕터로 되어 있는 하나의 소설이라고 보는 것이 낫겠다. 여섯 개의 챕터의 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정류장‘, ’목련빌라‘, ’필사의 밤‘, ’치우친 슬픔이 고개를 들면‘, ’여름 그림자‘, ’시인의 밤‘. 소설의 제목은 그것들 중 첫 번째와 세 번째의 제목을 이어 붙여 만들었다. 작가의 소설을 읽고 이야기할 때마다 불온함을 꺼냈다. 이번 소설을 읽고 나서는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6시 반에는 동생의 알람이, 7시에는 엄마의 알람이 울렸다. 8시에는 아이들을 깨웠다. 한 번 차린 상에 밥과 숟가락만 바꿔가면서 아침을 먹었다. 동생, 엄마 순으로 집을 나섰다. 동생은 낮에는 회계사 사무실에서, 퇴근 후에는 파트타임으로 두어 군데의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엄마는 사거리 건너 고시원 건물의 청소원이었고, 아버지는 그 옆에 재건축 아파트 공사장의 야간 경비원이었다.” (pp.23~25)
동생이 결혼에 마침표를 찍고 (그마저도 제대로는 아니지만) 집으로 들어온 것은 남편으로부터 폭력을 당하던 날 내가 동생네 집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동생은 어린 두 자식과 함께 돌아왔고, 이제 집에는 나이든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여동생과 나, 여동생의 어린 두 아이가 함께 살고 있다. 이 복잡다단한 가족의 어수선한 속내가 차려진 밥상에 시간차를 두고 달려들어야 하는 식구들의 면면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는 졸업을 했고, 그 사람은 복학을 했다. 나는 그 사람이 일하던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문을 닫을 무렵이면 그 사람이 들르곤 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시를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 사람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뜨거운 커피는 얼음을 탄 차가운 커피로 바뀌었을 뿐 밤의 서점은 여전히 손님이 없었다...” (p.84)
그리고 이 갑갑한 가족의 이야기에 사족처럼 나의 연애 이야기 그리고 나의 필사 이야기가 매달려 있다. 나는 연애를 이어갈 수가 없고, 나는 필사를 할 시간조차 내기 힘들어졌다. 그것들은 제대로 된 끝맺음이 될 수도 없다. 그런 나를 향해 동생을 위하여 더한 희생을 요구하는 엄마의 가혹한 말이 채찍질처럼 가해진다. 그런 내게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주저앉지 마...‘라고 말해주던 아버지는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다.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온 식구들은 순서를 정해 욕실을 사용했다. 엄마부터 씻고, 차례대로 동생, 두 아이들, 마지막으로 내가 씻었다. 씻고 나오니 엄마가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어른들은 매운 라면, 어린것들은 짜장라면을 한 그릇씩 뚝딱 해치웠다. 그리고 부지런히 이불을 깔았다. 어쩐 일인지 아이들도 보채거나 잠투정 없이 곱게 누웠고, 나도 식탁에 다시 앉을 생각 없이 마음 편히 누웠다. 처음으로 집 안의 불이 동시에 다 꺼진 날이었다. 배가 불러서인지 누운 지 얼마 안 되어 식구들 모두 곤하게 잠이 들었다.” (pp.148~!49)
번갈아가며, 시간차를 두고 밥상에 앉고 또 일어서던 가족들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드디어 같은 시간 함께 식탁에 마주 앉는다. 함께 먹고 함께 누워 함께 잠이 드는 장면을 읽자 이전의 밥상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러니까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라고 하면 좋겠지만 소설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어떻게든 각성의 시간을 가졌다. 집을 떠났다.
“오늘은 그래서 그런 시를 쓰고 싶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짙은 초록색으로 변한 이팝나무 이팔에 관해. 거짓말처럼 맑았던 그날 새벽하늘을 지나갔던 검은 새 한 무리에 대해서. 아무도 울지 않았던 그 밤에 대해서. 엄마의 꽃무늬 블라우스에서 맡아지던 나른한 살냄새와 동생의 품에서 꼬무락거리는 스무 개의 손가락과 스무 개의 발가락에 대해서. 그 손과 발이 잡아당긴 생의 끈질긴 얼룩과 여름 소나기에 대해서, 그 소나기 끝에 피어오르는 흰 구름에 대해서. 그해의 열대야에 대해서, 깊고 오래된 골목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운 사람의 그림자와 나의 눈물과 우리의 정류장과 모두의 무덤에 대해서. 서로의 체취로 속삭이던 노래와 지리멸렬한 계절에 속박되었던 오해와 피우지 못한 꽃과 기꺼운 약속과 작은 책상과 낡은 베갯잇과 차마 다하지 못한 희망과 나는 지금 여기 있다는 것에 대해서.” (pp.171~173)
불온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작가의 소설에서 어떤 점액질 같은 것이 느껴진다. 나는 눈으로 읽었는데 나의 손에 어떤 잔상이 남았다. 축축하고 끈덕져서 쉽사리 떨궈지지 않는 느낌이다. 불굴의 의지를 갖고 행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나와 결별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과정이 필사라는 행위로 드러난다. 멈추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고 위로 받아야 하는 삶이 여기에 있다.
김이설 /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 작가정신 / 194쪽 / 2020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