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일인칭 단수》

'멋부리고 혼자 바에 앉아서, 김렛을 마시면서, 과묵하게 독서'...

by 우주에부는바람

「돌베개에」

나는 만 스무 살이 되기 전인 대학교 2학년 때,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던 이십대 중반의 그녀와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으니 양해해 달라고 부탁했고, 소리를 크게 낼 수도 있다는 그녀를 위해 나는 입에 물 수 있도록 수건을 준비했다. 그날 이후 다시는 볼 수 없었던 그녀에게는 (우리로 치자면 시조 같은 것 아닐까 싶은) 단카를 짓는 취미가 있었고, 그녀는 나를 위해 자신이 직접 가내 수공업으로 제작한, 첫 장에 28일이라는 숫자가 스탬프로 찍힌 책자를 하나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나는 그녀가 지은 단카를 종종 읽었다. “벤다/베인다/돌베개//목덜미 갖다대니/보아라, 먼지가 되었다” 정확히 하루키스러운 설정이다.


「크림」

“지금까지 살면서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이 지독히 흐트러지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자주라고 할 정도는 아니어도 몇 번쯤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 원에 대해―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에 대해―곰곰이 생각했다. 열여덟 살 때 그 정자의 벤치에서 그랬듯이, 눈을 갖고 심장박동에 귀기울이면서.” (pp.49~50) 친하지 않은 그녀로부터 받은 초대장을 들고 찾아간 동네, 그러나 그곳에서 열리는 피아노 연주회는 존재하지 않았고, 나는 돌아나오는 중에 들른 놀이터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되고, 그 노인은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에 대해 묻고,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내게 최고로 좋은 것을 의미하는 크림 중의 크림을 가르쳐주고,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아는 동생에게 한다.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재즈 마니아인 하루키가 찰리 파커를 활용한다. 나는 대학 시절, 있지도 않은 찰리 파커의 앨범을 창조하고 그것에 대해 비평하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뉴욕의 중고 레코드 가게에서 내가 창조한 앨범을 발견한다. 나는 고민하다 결국 레코드를 사지는 않았는데, 다음날 찾아갔을 때 그런 레코드는 찾을 수 없었다. 그 레코드의 제목이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이다.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

<위드 더 비틀스>는 비틀스의 1963년 앨범이다. 당시에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다른 앨범들이 그렇듯) 현재는 크게 주목받는 앨범은 아니다. 흑백 음영이 얼굴을 반쯤 가리는 앨범 재킷이 더욱 유명하다. 여하튼, 소설은 이 앨범을 들고 있던 소녀의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그러고 나서 소녀는 곧바로 사라진다. 소설은 그 소녀가 아닌 다른 소녀와의 연애 이야기이고, 그 소녀의 오빠와의 두 번에 걸친 만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소설 속에 표현된 야구팀인 야쿠르트 스왈로스는 (하루키는 이 팀에 대한 애정을 여기저기서 밝힌 바 있다) 우리의 삼미 슈퍼스타즈를 연상시킨다. 다른 때는 몰라도 소설 속의 내가 팬으로 활동하던 시기는 그렇다. 패배를 밥 먹듯이 하는 팀이 지고 있는 동안 팀의 전용 구장인 진구 구장에서 드러누워 작성한 시들이 소설에 몇 편 실려 있다.


「사육제(Carnaval)」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 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 볼 줄 알았어―가면과 민낯 양쪽을. 왜냐하면 스스로 영혼을 깊이 분열시킨 인간이었으니까. 가면과 민낯의 숨막히는 틈새에서 살던 사람이니까.” (p.169) 하루키는 그러니까 재즈 마니아이면서 클래식 애호가이기도 하다. 분명히 못생겼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러나 그만큼이나 또렷하게 매력적인 그녀와 나는 클래식 공연장에서 만나고, 무인도에 가져갈 단 하나의 피아노 곡으로 슈만의 <사육제>를 고르면서 꽤 친해진다. 하지만 사기 사건의 범인으로 등장하는 그녀를 텔레비전에서 본 이후로는 더 이상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군마현의 온천에서 우연히 만난 인간의 말을 하는 원숭이는 도쿄구의 시나가와구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시나가와 원숭이라고 불린다. 시나가와 원숭이는 인간 이성에게 성욕을 느끼지만 그것을 현실적으로 풀 수는 없어, 살짝 여성의 이름을 훔치는 것으로 욕구를 대신한다, 라고 비밀스러운 고백을 한다. 하지만 그날 밤 이후 시나가와 원숭이를 다시 보지는 못하였고, 그로부터 오 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운전면허증을 잃어버린 이후 자신의 이름을 깜빡 잃어버리곤 하는 여인을 한 명 만나게 된다.


「일인칭 단수」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아마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이―중요한 분기점이 몇 곳 있었다. 오른쪽이나 왼쪽,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오른쪽을 선택하거나 왼쪽을 선택했다(한쪽을 택하는 명백한 이유가 존재한 적도 있지만,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경우가 오히려 많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항상 스스로 선택해온 것도 아니다. 저쪽에서 나를 선택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pp.223~224) 슈트를 입고 멋 부리다 부지불식간에 호되게 당하는 내가 소설에 등장한다.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종종 어울리지 않게 홀로 비장한 혹은 비감한 문장이 발견되곤 한다. 어쩌면 하루키도 그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소설 속 그녀의 핀잔으로 드러낸 것이 아닐까, 라고 상상하니 재밌다. 그러니까 소설 속에서 그녀는 나에게 '멋부리고 혼자 바에 앉아서, 김렛을 마시면서, 과묵하게 독서에 빠져 있는 거... 그러고 있으면, 재밌나요?' 라고 묻는다.



무라카미 하루키 / 홍은주 역 / 문학동네 / 233쪽 / 2020 (2020)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이언 매큐언 《스위트 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