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5. 2024

유진목 《산책과 연애》

사실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도 없고 허구의 영역에서 안심할 수도 없는 경계

  “이쯤에서 한 가지 일러두고 싶은 점이 있다. 이 책은 수기로 쓴 것을 타이핑해 정리한 것이다. 무분별하게 쓰여진 뒤에 나름 의도를 가지고 재구성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노트를 준다면 전혀 다른 형식의 책으로 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글씨를 알아볼 수 있다면 말이다.” (p.30)


  산책을 좋아하는, 어쩌면 산책밖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알뜰히 살펴보고 싶은 선배가 한 명 있다. 우리 집에서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에 (세 정거장이던가) 살고 있는데, 아직 가보지 못했다. 같은 행정구역에 살고 있는 탓에, 내게 확진자 발생 문자가 날아오면 선배에게도 날아갔겠구나, 여기게 된다. 산책을 좋아하고, 산책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선배가 쉬이 돌아다니지 못하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사랑을 품은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거의 매번 지고 만다. 사실이 그렇다. 사랑이 결여된 세계는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 속에 살아가게 내버려둔다. 사랑이 결여된 세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방치되어 무능력한 존재로 낙오한다. 낙오자는 사랑을 품은 채로 병든다. 먼저 마음이 병들고 병든 마음이 몸을 무기력한 상태로 전락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은 너무 많이 반성한다. 사랑하는 자신과 사랑이 없는 세계를 반성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진단한다. 하지만 세계를 바꿀 힘은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하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힘이 넘친다. 사랑이 없는 사람의 정력적인 얼굴과 힘찬 걸음걸이를 우리는 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인가. 사랑하기 때문에 병들고 무기력한 사람이다.” (pp.63~64)


  시리즈의 다른 책들이 어떻게든 제목에 사용된 두 개의 단어를 골고루 이용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면 《산책과 연애》에는 ‘산책’이 현저히 부족하다. 로버트 발저가 잠시 등장할 뿐이다. 로버트 발저는 《산책자》의 저자이고, 나는 이 책을 한 소설가로부터 추천을 받아 오래 전에 샀는데,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에 앞의 사분의 일쯤을 읽다가 멈춘 상태이다. 언젠가는 다시 읽게 되겠지...


  “... 자기 자신과 가까운 인간은 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에 유해하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는 인간이 타인과의 거리 두기에 가까스로 성공한다. 그것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가장 가까운 거리라는 것. 그것이 내가 살면서 맺어온 관계들에서 다만 인간으로 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배운 것이다.” (p.76)


  그렇게 연애에 보다 한정되어 있는 산문인데, 그게 또 유독 우울하기 그지없다. 작가가 지금 남편과 함께 부산에서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것을 안다. 책에 그 남편을 실명으로 그러나 가명인 것처럼 종종 등장시킨다. 그럼에도 우울하다. 나는 그렇게 투명하게 전시되고 있는 작가의 우울을 통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더욱 진실일 수도 있겠다는 실상을 바라본다.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서점의 이름은 손목서가이다.


  “’지금 죽는 것‘에 실패한 나는 대신에 ’언제든 사는 일을 그만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삶의 동력으로 삼았다. 언제든 그만 살면 되니까. 생각하면 희한하게 조금 더 살 수 있었다. 정말로 그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p.92)


  기획으로 끌어올려진 단어가 왜 ’사랑‘이 아니고 ’연애‘인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생각했다. ’사랑‘이 어떤 완성된 형태를 지칭하는 것 같다면, ’연애‘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진행을 지시하는 것 같다. ’사랑‘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라는 느낌이라면 ’연애‘는 거스를 필요가 없는 운명이라는 느낌이다. 생각해보니 ’연애‘는 왠지 허상인 듯한 ’사랑‘에 부여된 몸뚱이 같다. 


  “한번은 찻집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데 이제 막 찻집으로 들어오는 내가 있었다. 나는 내가 걸어와 맞은편 자리에 앉는 것을 보았다. 맞은편의 나는 나를 보고도 알지 못하고... 내가 나를 본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당신도 그런가? ... 당신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나?” (p.127)


  몸뚱이를 부여잡고 이리저리 보채는 글들이 책에는 가득하다. 징징거리는 것 같기도 한데, ’사랑‘이 아니라 ’연애‘여서 가능한 글이겠구나 여겨지기도 한다. 글을 통하여 자신을 전시하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그리고 어쨌든 산문은 그런 전시에 유리한 장르이다. 《산책과 연애》는 온전히 사실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도 없고 온전히 허구의 영역에서 안심할 수도 없는 어떤 경계에 서 있는 글들의 모음이다.



산책과 연애 / 유진목 / 시간의흐름 / 133쪽 / 2020 (2020)

매거진의 이전글 김괜저《연애와 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