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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5. 2024

한정원《시와 산책》

매혹적이지만 압도적이지 않게, 내밀하고 서정적으로...

  “태어나 성장하고 일하며 대략 열 개의 도시를 거쳤다. 사람과 공간을 여의는 것이 이력이 됐다. 대학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단편영화를 세 편 연출했고 여러 편에서 연기를 했다. 구석의 무명인들에게 관심이 많다. 수도자로 살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고, 지금은 나이든 고양이와 조용히 살고 있다. 읽고 걷는 나날을 모아 『시와 산책』을 썼다. 책을 덮고 나면, 아름다운 시들만이 발자국처럼 남기를 바란다. 앞으로는 나를 뺀 이야기를 계속 써나가고 싶다.”


  작가 스스로가 밝히고 있는 소개글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마음에 들었다. 마냥 무겁지 않으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재치는 자신을 소개하는 글에서부터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순식간에 한정원이라는 작가의 글에 매혹되었다. 매혹적이지만 압도적이지는 않아서 더욱 좋았다. 그리고 작가의 다른 글이 언젠가 어딘가에서 책으로 엮여 나온 적이 있나 흔적을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겨울에 말을 타고 언 강 위를 지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강이 풀리고 나자 그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강이 얼어갈 때 소리도 같이 얼어 봉인되었다가, 강이 풀릴 때 되살아난 것이다. 말도 사람도 진작에 사라졌지만, 그들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소리가 남은 것. 눈을 감고 그 장면을 상상하면 울컥할 만큼 좋았다. 누군가는 실없는 이야기로 치부할 테지만, 나는 삶에 환상의 몫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려는 삶에서도 내밀한 상상을 간직하는 일은 필요하다. 상상은 도망이 아니라, 믿음을 넓히는 일이다.” (pp.17~18)


  무심코 보고 읽다가 울컥하게 만드는 구석도 적지 않은데 작가가 어딘가에서 들었다는 언 강의 이야기도 그중 하나이다. 얼어 봉인되었던 말발굽 소리가 봄이 되어 강이 녹자 다시 들리는 장면은 보기 드물게 시청각적이다. 40년간 소록도, 그 외딴 섬에서 한센인들을 돌보다, 혹시라도 화려한 찬사를 받을까봐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남긴 채 고국으로 떠났다는 두 명의 외국인 수녀의 이야기는 또 어떻고...


  “숲에서 길을 읽기 좋은 때가 두 번 있는데, 폭설이 내린 다음 날과 11월의 아무 날이다. 각각 흰 눈과 검붉은 낙엽으로 바닥이 다 덮여서 길이라 부를 만한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길의 경계가 지워지고 방향감각마저 흐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렇게나 걸을 수 있는 자유가 벌어진다. 갈피 없이 온전히 공간을 누리며 산책할 수 있는 특권이 그 날들에는 있다.” (p.39)


  ‘시와 산책’이라는 테마는 시의 정신으로 무장한 채 산책이라는 육신을 통해 우리 앞에 지긋하게 놓인다. 이름마저 생소하거나 이름은 생소하지 않아도 막상 그 시는 생소한, 작가의 시들을 조금씩 투입하며 글을 진행시킨다. 자신을 묘사할 때는 서정적이고 그저 아름답기 그지없는데, 인용된 어떤 시들의 어떤 문구는 일종의 잠언처럼 깊고 오래되어서 한동안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있어야 한다.


  “강이라면 수천수만 개의 물결들이 현기증이 나도록 반짝거리던 것, 내가 거기 돌멩이를 무수히 던지며 혼자 놀았던 것, 어느 날 강에 업혀 잠든 듯 흘러가던 죽은 여자를 보았던 것이 생각난다. 강은 고요하고 지겹고 아름다우며 우물처럼 으스스했다. 물결은 가만히 보면 날개를 펼친 새와 닮았는데, 그래서인지 강은 늘 나를 두고 멀리 가버렸다. 강 앞에서 나는 언제나 서운한 사람이 되었다.” (p.77)


  작가가 무심하게 툭 하고 던지는 짤막한 표현이 갑작스레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어버리는 순간들도 여럿 있다. ‘어느 날 강에 업혀 잠든 듯 흘러가던 죽은 여자’라는 표현이 그러하다. 아, ‘강에 업혀’ 라니, 싶은 것이다. 자신의 집에 함께 살며 일을 해주는 언니가 동네 대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러가는 그 밤의 골목, 그 밤의 골목에서의 자신을 ‘더운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대목도 좋았다.


  “아침이 어두워지고 있다. 읽다가 덮어둔 책 위로 내 회색 고양이가 몸을 누인다. 고양이는 책을 읽지 않지만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책을 얼마나 가볍게 사랑하는지. 멀리 있다가도 기꺼이 걸어와서, 꼭 그 위에 털썩 누워 잠들어버린다.

오늘은 회색 위에 회색 고양이가 얹히니 구별이 되지 않는다. 나는 털이 많은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한다. 그게 기쁜지 책은 자꾸 갸르릉 소리를 낸다.” (p.137)


  한동안 하고 있는 일과 관련하여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분주하게 살았다. 일단 일에서의 한 고비는 넘겼지만, 한 해가 마감되는 시기이고 겨울의 초입이고 아버지는 여전히 병중이고 엄마는 계속 심심하다. 여간해서 내 분주함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그리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문득문득 억울할 때도 있다. 그럴 때 이런 한정원의 《시와 산책》을 만나서 좋았다, 책 속의 고양이들도, 책 바깥의 내 고양이들도...


  “나는 일부러 꽃그늘 밑에 그릇을 둔다. 몇 군데 나누어 준 밥그릇에 고양이들이 꽃잎처럼 둥글게 붙어 배를 채우는 동안, 나는 쪼그려 앉아 가만히 봄볕을 먹는다. 서로 다투지 않고, 나 자신과도 다투지 않는, 순한 시간이다.” (pp.149~150)



한정원 / 시와 산책 / 시간의흐름 / 172쪽 / 20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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