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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5. 2024

정지돈《영화와 시》

과거 회귀를 불허하는 과거 회상에 적합한 독서를 연달아...

  대학교 일학년 때 수다와 침묵 사이의 택일, 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제목만 있고 본문은 없는 시였다. 황지우와 장정일을 넘어 박남철을 탐독하던 시기였다. 선배들에게 크게 욕을 먹었다. 대학로의 씨앙씨에에서 미클로사 얀초 감독의 <붉은 시편>을 보고, 비디오 테이프로 피에르 파올로 파졸로니 감독의 <살로 소돔의 120일>과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 태엽 오렌지>를 보았다. 동생이 영화과에 진학했다.


  “일반적으로 다음 네 가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나와 맞지 않는다. 애국심, 애향심, 애교심, 애사심. 그래서인지 대구 출신인 나는 대구에 사는 게 힘들었고(대구는 애향심의 도시다, 특히 수성구 사람들의 지역에 대한 자부심은 인류학적 연구 대상이다) 대학교를 다니는 게 힘들었으며(과 잠바는 지구의 오물이다) 회사 간부들과 의견이 맞지 않았고(회사가 잘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람) 한국에서 사는 게 힘들다...” (p.59)


  정지돈의 《영화와 시》를 읽으면서 이 책은, 내가 만약 멈추지 않고 계속 시를 썼다면, 동생이 아니라 내가 영화과에 진학을 했다면,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느 나이쯤의 내가 도착했을 수도 있는 지점이 아니었을까, 하고 잠시 상상했다. 책에 등장하는 ‘삶이 그렇듯 무엇도 필연적이지 않다. 동시에 이미 이루어진 것은 그 무엇도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라는 문구를 읽기 전까지만 그랬다.


  “영화를 보면 잠이 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나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건 집에서 영화를 보건 잠이 드는데 정도가 너무 심각해 기면발작증에라도 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사실상 내가 보면서 잠들지 않은 영화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평소에 걸작이라고 말하는 영화들은 거의 대부분 잠든 영화들이다(물론 내가 타인에게 말하는 영화의 앞에는 늘 ‘걸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친구는 이렇게 물었다. 걸작이 아닌 영화가 있기는 해?). 그렇다고 세간의 평가처럼 예술영화는 졸리고 지루하다거나 잠이 올수록 더 좋은 영화라는 등식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잠이 든 영화가 모두 좋은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좋은 영화는 모두 우리를 잠들게 한다.” (p.71)


  시를 쓰는 것을 그만둔 후에도 시를 읽는 것은 그만두지 못하였다. 얼마 전에 유진목의 《작가의 탄생》을 읽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미가 없어서 기록을 남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직 고민 중이다. 고민을 하면서 유진목의 다른 책을 검색하다가 ‘말들의 흐름’의 다섯 번째 권인 《산책과 연애》를 발견했고, 그것이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권에서 세 번째 권까지의 독서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그 무엇도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 비판자들은 대체로 권력지향적이며(현실을 고치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므로) 그 대가로 차기 정권을 넘겨받는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비판자와 동조자들은 (나라 또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크게 다를 바 없는 정책을 이어나간다(한국과 미국의 좌파와 우파처럼). 반면 보르드스키식의 사보타주는 그 정체와 폭력을 알 수 없기에 대응할 수 없다. 이런 식의 행위 모델을 알렉세이 유르착은 담론장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대신에, 그것을 내부로부터 탈영토화시키는 또 다른 전략이라고 말한다. 대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일탈이 주류가 될 때에야 비로소 근원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p.110)


  사실 정지돈은 후장사실주의라는 일련의 작가 그룹의 대표 주자로 알려져 있다. 몇 년 전 소설가인 친구에게서 처음 후장사실주의라는 명칭을 듣고, 이건 또 뭔가 싶었는데, 이제야 후장사실주의란 ‘대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일탈’을 꿈꾸는 자들의 ‘꿈’과 같은 것이 아닐까 유추해본다. 물론 변화는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이고...


  “너무 맥없이 들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게 나와 내 친구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훌륭하지도 비참하지도 않고 보수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으며 세계에 맞서거나 세계에 종속되지 않은 상태로(또는 둘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것.” (p.140)


  금정연과 정지돈은 이전에 《문학의 기쁨》이라는 책을 함께 쓴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담배와 영화》에서 《영화와 시》로 낱말의 바통을 주고 받으며 나란히 책을 썼다. 이 성실한 관계에 보답을 하는 차원에서 두 권을 연달아 읽었다. 과거 회귀를 불허하는 과거 회상에 적합한 독서였다고나 할까. 그 사이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고 이제 나도 넷플릭스로 영화와 드라마를 본다, 몇 권의 시집쯤은 항상 놓여 있는 책상에 앉아.



정지돈 / 영화와 시 / 시간의흐름 / 151쪽 / 20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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