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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5. 2024

금정연《담배와 영화》

‘담배와 영화’를 오브제 삼아 벌어지는 은유와 환유의 카니발...

  “내가 본격적으로 극장에 다니기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대부분의 극장은 이미 금연구역이 된 후였다. 다시 말해 나는 극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과 그들의 머리 위로 피어오르던 푸른 연기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고, 그것을 떠올리며 어떤 종류의 그리움을, 차라리 상실감을 느낄 수 있다.” (p.26) 


  불행이랄지 다행이랄지 나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담배를 피울 수도 있었던 혹은 담배를 피우며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가능했던 마지막 세대이다. 극장 말고도, 지하철에서도(역이 아니라 열차 내부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있던 마지막 세대이기도 하다. 열차 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된 다음에도 역에서는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다 열차가 들어온다는 신호음이 울리면 얼른 담배를 끄고 열차에 올라탔다. 


  “... 나는 이 책이 당신 사무실 책상의 맨아래칸 서랍에 놓였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이 남의 눈을 피해 이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 조금 읽은 다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도로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근 뒤 화장실에 가서 손을 닦고 입을 헹구고 자리로 돌아와 하던 일을 마저 하거나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면 좋겠다.” (p.49)


  2호선 열차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되었지만 1호선에서는 여전히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 있었고, 서울 시내의 메인 극장에서는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된 다음에도 한동안 변두리의 삼류 극장에서는 여전히 담배를 피우며 영화를 보곤 했다. 재수를 하던 시절 그렇게 석촌 호수 옆의 호수 극장에서 담배를 피우며 영화를 보았다. 원래는 두 편이 동시 상영이었고 급기야 세 편을 동시 상영으로 틀어주기도 했다. <영웅본색>과 <씨받이>와 <땡볕>을 그렇게 담배를 피우며 보았다.


  “한때 나는 영화 속 흡연 장면들을 이어 붙여서 하나의 영상으로 만들고 싶었다. <시네마 천국>(1988)에 나오는 키스신 모음처럼. 이제는 아니다. 유튜브에서 영화 속 담배 혹은 smoking scenes in movie라고 검색하면 누군가 이미 만들어놓은 영상을 수십 개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28)


  담배를 피우면서 영화를 볼 수 있었으니 영화 속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오면 더욱 각별하게 보았던 것 같다. 영화 속 배우가 담배를 물고 있는 입의 모양과 호흡에 따라 변하는 표정과 날아가는 연기의 모양까지, 객석에 몸을 파묻은 채로 따라 해보기 일쑤였다. 흡연 장면 모음이 있다는 작가의 언질에 유튜브를 뒤져 틀었는데, 배경 음악은 Cigarettes After Sex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Truly,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시도해보아도 좋겠다. 


  “누군가 내게 담배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릴 것이다. 다시 한 번 묻는다면 말끝을 흐리며 잘 알아듣지 못하게 중얼거릴 거고.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묻는다면 그때 비로소 내 지저분한 신발 코를 바라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할 것이다. 문장······ (네? 뭐라고요? 제발 알아듣게 좀 말해요!) 담배는 문장이라고요······

하나의 문장은 언제나 다음 문장을 부른다. 담배 역시 언제나 다음 담배를 부른다. 로만 야콥슨의 분류에 따르면, 그때 담배는 은유가 아닌 환유가 된다.” (p.125)


  책을 읽으면서 저절로 회고를 하게 되기는 하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못하였다. 《담배와 영화》는 ‘담배와 영화’를 오브제 삼아 벌어지는 은유와 환유의 카니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와 담배와 소설과 비평과 나의 경험과 어쩌면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들까지 난분분하다. 잊고 있던 영화들이 등장하여 반가운데, 그 영화들이 속속들이 떠오르지 않아서 풀이 죽기를 반복하였다. 


  “이 책의 부제 ‘혹은: 나는 어떻게 흡연을 멈추고 영화를 증오하게 되었나’는 물론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혹은: 나는 어떻게 근심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나>(1964)에서 가져온 것이다. 영화는 수십 개의 핵폭탄이 연달아 터지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희망을 약속하는 베라 린의 노래 <우리는 다시 만날 거예요We will meet again>가 흐르는 가운데, 큐브릭은 우리에게 각기 다른 핵폭탄들이 터지며 만들어내는 다양한 형태의 버섯구름들을 1분 17초 동안 보여준다” (p.141) 


  그러고 보니 담배를 피우지 않고 그리운 것에는 담배 연기도 빠뜨릴 수 없다. 앞으로도 뿜고 옆으로도 뿜고 위로도 뿜고 아래로도 뿜을 수 있었는데, 혀를 말아 동그랗게 도넛 모양을 만들 수도 있었는데... 그 연기를 극명하게 관찰하기에 어두운 영화관만큼 적당한 곳이 또 있었을까 싶다. 영사기가 뿜어내는 빛줄기를 관통하며 도도하게 승천하던 담배 연기의 황홀함이 그립다, 이제는 불가한...



금정연 / 담배와 영화 / 시간의흐름 / 151쪽 / 20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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