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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5. 2024

정은《커피와 담배》

다양한 생의 이력과 좌충우돌인 생의 활력 안으로...

*2020년 11월 16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심하지 않지만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구가 몇 차례 욱 하고 올라왔다.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볼 때, 머리를 아프게 하는 일이 잠을 방해할 때, 길을 지나다가 갑작스레 내 앞으로부터 풍겨오는 고소한 냄새를 맡아야 했을 때 등등이다. 사실 이런 욕구는 계속해서 생기는 일이기는 한데 문제는 그것을 참아야 한다, 라는 방어의 심정이 갑작스레 약해지는 경우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 욕구를 왜 이렇게 열심히 참고 있는 거지, 하는 의구심이 커질 때가 문제인 거다. 


  “담배를 어떻게 끊었냐고 물어보면 금연자들은 어느 날 갑자기 끊었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다. 담배를 피우는 걸 멈출 수는 있어도 끊을 수는 없다. 그 관계에 정전은 없다. 오직 휴전뿐. 담배를 끊으면 얻는 게 많을까. 잃는 게 많을까. 잘 모르겠다. 담배를 끊으면 담배를 피우는 내 모습도 잃는다. 담배를 피울 때는 하루가 피우는 담배 개수만큼 분할된다. 하루에 3개 혹은 12개 혹은 20개로. 하나의 담배와 또 다른 담배 사이의 간격만큼 분할되던 하루가 분할이 안 된 채 붕 떠버린다. 시간관념 체계가 엉망이 되어버린다. 아침 담배와 함께 시작하던 오늘 하루가 시작되지 않는다. 계속 어제를 살고 있는 기분이다. 금연하면 담배 피우는 만큼 시간을 벌 수 있다니, 그런 건 없다. 담배를 못 피우는 시간을 더 얻었을 뿐. 그럼에도 담배 피우기를 중단한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렇다.” (p.83) 


  아내와의 약속 탓에, 정확하게는 난 약속을 어기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아내는 그 약속을 허투루 넘기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레 마지막 담배를 피운 것이 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구 개월째 금연이 진행 중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흡연 방어의 심정이 조금 약해진 것 같아서 일부러 담배가 제목에 들어가는 책을 읽기로 하였다. 일종의 이열치열 같은 것이다.


  “... 곁에서 지켜보니 스님이란 존재는 엄격한 계율에 따라 사는 사람이라기보단 마음에 걸림이 없이 그저 자유롭게 사는 사람인 것 같았다. 금연에 성공한 사람인데 원할 때만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까나. 동안거/하안거 기간 동안 수행처에 들어가 수행을 하고 나오면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져서 담배를 한 번 만지기만 해도 10미터 밖에서도 손가락에 밴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수행 기간에는 담배를 안 피운다고. 하지만 절에ᅟ것는 얽매임 없이 담배를 피우셨다. ‘담배를 피우면 안 돼’라는 생각 자체에 얽매이는 것을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들이 어떤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렇게 자유로웠는지, 아니면 그저 실패한 수행자였는지.” (p.45)


  아무튼 시리즈의 성공과 함께 비슷한 유형의 시리즈들이 여러 출판사에서 등장하였다. ‘말들의 흐름’이라는 이 출판사의 시리즈가 조금 다른 것은 일종의 끝말잇기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내게 커피는 담배, 영화, 시, 산책, 연애, 술, 농담, 그림자, 새벽, 음악이다.’라는 설명이 잠시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 시리즈에서 나온(그리고 나올) 책들의 제목에 들어간 단어이다. 그러니까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권은 《커피와 담배》이고, 두 번째 권은 《담배와 영화》인 식이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열 번째 책은 《새벽과 음악》이 된다.


  “미용실은 안 가도 되고, 화장도 안 해도 되고, 옷도 친구들이 주는 옷을 얻어 입으면 되지만, 커피는 포기할 수 없었다. 커피는 유일하게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영역이고 내가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영역이었다. 커피는 내가 나를 사랑하고 대접할 수 있는 쉬운 방법잉다. 커피는 민주적이다. 커피는 쉽게 손을 내밀어준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내가 발을 반쯤 걸치고 삶의 여유를 꿈꿔볼 수 있게 한다. 커피마저 없다면 내 삶은 무미건조하고 비참해질 것이다. 커피는 아무것도 아니므로 거기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p.18)


  내가 그저 담배의 욕구에 오래 사로잡혀 살았다면 지은이는 커피와 담배라는 두 가지의 대표적인 기호 식품에 충분히 몰입하고 있다. 사실 내게 커피는 단 맛의 버블로 감싸 안은 음료에 가깝고, 때때로 탄 맛이 나면서 고소하거나 신 맛이 나면서 서툴게 들이마시는 것 정도까지 나아가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커피에서 이런저런 과일 향을 추출하여 설명한다거나 혀와 입에서 느껴지는 감촉을 의미하는 마우스필을 논할 줄 아는 까페 여름의 콩 볶는 선배를 두어 달에 한 번 만나기는 한다. 


  “어느 날 영화과 동기 J가 자신의 단편영화에 출연해달라고 연락해왔다. 영화 제목은 <타히티>였는데 대본을 읽어도 무슨 얘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같이 사는 두 여자가 나오는 영화인데, 집에서 늘 비키니를 입고 있는 여자가 있고 옷 좀 제대로 입고 있으라고 늘 나무라는 여자가 있다. 둘은 언젠가 함께 타히티에 가는 꿈을 꾸는데 어느 날 정말로 타히티로 떠나기로 한다. 옷 좀 제대로 입고 있으라고 나무라던 여자는 공항에서 비키니를 입고 여행가방을 들고, 집에서 늘 비키니를 입는 여자를 기다린다. 집에서 늘 비키니만 입던 여자는 멋진 트렌치코트를 입고 아메리카노를 들고 여행 가방을 들고 오다가 공항 앞에 비키니를 입고 서 있는 여자를 보고는 모르는 사람인 척 되돌아간다는 이야기다. 친구가 왜 이런 이야기를 썼는지 알 수가 없다. 더 알 수가 없는 건 내가 출연하기로 한 것이다.” (p.55)


  여하튼 그래서 책을 읽고 흡연의 욕구가 많이 상쇄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최소한 책을 읽는 동안은 그랬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컴퓨터공학과 영화를 배우고 지금은 서사창작을 공부한다는 작가는, 그 생의 이력이 다양하고 생의 활력이 좌충우돌 타입이라 커피와 담배와 은근히 연을 맺고 있는 이야기들이 충분히 재미있었다.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는 동안 카누의 다크 로스트 아메리카노를 아이스로 한 잔 마셨다. 



정은 / 커피와 담배 / 시간의흐름 / 131쪽 / 20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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