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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7. 2024

정지돈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리스로.》

인물과 장소만 있다면 마음껏...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리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우리는 인종차별의 도시 파리에 있었다. 파리는 여성혐오의 도시이기도 하다. 파리는 산책자의 도시이다. 고로 산책자는 여성혐오자다. 사뮈엘 베케트는 파리 9구의 고도드모루아 거리에 있는 창녀촌을 자주 찾았다. 하루는 여자 하나가―아마 매춘부였겠지?―베케트에게 다가와 서비스를 이용할 거냐고 물었다. 베케트가 거절하자 여자가 비꼬는 투로 물었다. “그러시겠, 그럼 누굴 기다려요? 고도를 기다리시나?”』 (p.25) 이런 류의 유머들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읽을 수가 있었다.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에는 엠이 등장하고 여러 장소가 등장하다. (책의 표지에 정지돈 연작 소설집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누구여도 상관 없는 인물과 어떤 곳이든 장소만 주어진다면 어떻게든 소설을 쓸 수 있어, 라고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아이는 아주 귀여웠고 어렸기 때문에 인형을 보면 눈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 눈알을 빼려고 했다」

  “지수는 현재 맥도날드 법무팀에서 일하며 밤에는 웹소설을 쓴다.

  맥도날드에도 법무팀이 있어요?

  엠이 물었다.

  1982년 재정된 햄거법이라는 게 있어요. 오리건 주에서 덜 익힌 패티를 판매하다 생긴 햄버겨병 때문에 생긴 법입니다. 아직 국내에서는 관련 법 조항이 없고요. 한국에는 패스트푸드 산업과 관련한 법적 분쟁이 많지만 제대로 된 판례가 없어요.

  그러면 분쟁에서 맥도날드 편을 드는 거예요? 엠이 물었다.

  아니요.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지도 교수가 말했죠. 햄버거의 편을 드는 거라고 생각해.” (p.49) 그 유머들이 꽤나 신랄하기 때문에 작가의 소설을 계속 읽는다. 제목이 불편할 정도로 길다는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지금은 영웅이 행동할 시간이다」

  “... 엠은 고전주의자다. 이런 말이 우스꽝스러워도 어쩔 수 없다. 태어난 연도로는 MZ 세대였지만 엠은 이상할정도로 새로운 매체에 저항적이었다. 틱톡이나 유튜브는 상상할 수도 없었고 페북, 인스타, 트위터, 클하 모두 증오했다. 하지만 아이디는 있었다.

  눈팅용이야.

  엠이 말했다. 시대와 불화하려면 시대를 알아야 하거든.” (p.82) 주의 깊게 읽는다면 엠의 실체에 보다 부합하는 인물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내부순환」

  “한참을 기다렸지만 미치 미치는 오지 않았다. 바리스타에게 물어보니 화장실에 간 거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문제는 이 카페엔 화장실이 없어 스위스 그랜드 호텔의 호장실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스위스 그랜드 호텔은 카페에서 20분 떨어진 백련산 언덕바지에 있었다. 나와 엠이 당황한 눈으로 바리스타를 보자 바리스타는 어깨를 으쓱했다. 호텔 로비 화장실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잖아요. 바리스타는 우리를 물끄러미 보더니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다음 말을 보탰다. 깨끗하고 따뜻하고. 좋지 않아요?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좋네요. 그리고 미치 미치가 오길 기다렸다.” (pp.138~139) 스위스 그랜드 호텔이라면 조카의 돌잔치가 치러졌던 곳이다. 아직 홍제 사거리에 고가도로가 있을 때이다. 몇 년 전에 스위스 그랜드 호텔 수영장을 이용했다. 레인 구분이 되어 있지 않았고 수영장의 일부분의 수심이 깊어서 아내가 힘들어 했다.


  작가 에세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 모든 역사는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 같은 갈등 구도로 환원된다...” (p.145) 내부순환도로가 고건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테지만 고건이라는 이름의 등장이 오랜만이고, 작가의 에세이에 등장하여 의외다. 한동안 나는 내부순환도로를 따라 출근하고 강변북로와 88도로를 이용하여 퇴근한 적이 있다.


  환승: 덧붙임 「생각의 열차」 안은별(문화연구자)

  “어쩌면, 너무 쉽게 잊혔던 사람들과 생각들과 연결고리들을, 아니 사실은 잊힌지도, 잃어버린지도 몰랐던 것들 사이에 한 번도 보지 못한 연결을 만드는, ’발굴‘해서 ’박제‘해 보인다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곧장 달려나가는 일종의 ’탈 것‘을 만들어내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형태적으로 여러 군데에 흩어진 파편들을 섬광처럼 한꺼번에 드러내는,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 움직이는 방식 그 자체가 중요한 예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것들을 읽었고 썼다.” (p.176) 안은별은 《연구자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이동 중에, 글쓰기의 자리에 대한 생각들〉이라는 글을 썼다. 나는 작가가 인물과 장소만 있으면 글을 쓸 수 있다, 라고 보았는데, 안은별은 ’작품들이 움직이는 방식‘들을 읽었다고 썼다.

 

  대화 「정지돈 x 안은별」

  “... 우리의 신체는 하나이지만, 정신적·문화적으로 우리는 늘 어딘가에 올라타고 운반되고 이동하고 함께 동승하곤 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신체는 중요한 한계점이자 바운더리이고 존재의 근거이지만 그 너머를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점이 바로 은별 씨가 말한 요소나 부품들의 결합인 것 같아요. 제가 소설에서 내용적으로 형식으로 추구하는 것도 이런 지점들이고요. 자아를 어떻게 해체하고 다시 결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재결합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가 언제나 무언가에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을 갈아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 같아요...” (pp.224~225) 이후 안은별은 정지돈에게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글쓰기 혹은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고,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새로운 글쓰기를 만들어냅니다. 다만 생각한 것만큼 새롭지 않을 뿐······.” (p.226)



정지돈 /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리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 작가정신 / 226쪽 /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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