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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7. 2024

김초엽 《행성어 서점》

SF라는 거푸집으로 찍어내는 현대 사회와 현대인의 이야기...

  김초엽의 ‘짧은 소설’,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지만 각각의 소설이 은근히 길다. 엽편이라고 불리는 짧은 소설들과 비교하면 그렇다. 작가는 SF 장르의 소설을 쓰고 있으며, 이번 짧은 소설 모음집 또한 이야기의 거푸집은 SF 장르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작가가 관심을 가지는 이야기의 속살에는 장르 구분이라는 경계의 의미가 없다. 작가는 현대인의 심리 그리고 현대 과학기술의 다종다양한 측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 집은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었다. 피하라와 물체의 접촉을 차단한다는 목적을 최대한으로 달성하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파히라는 무척이나 날이 서 있었다. 그는 나를 함부로 대했고 유일하게 접촉 통증을 덜 느낀다는 발끝을 이용해서 물건들을 밀어 던졌다... 마흔 살, 경력의 최고점을 달리던 건축가가 수술 후유증으로 하루아침에 어떤 물체에도 닿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어느 무엇에도 닿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에, 고통은 스물네 시간 그를 조이고 있었다...” (p.19, 〈선인장 끌어안기〉 중)


  〈선인장 끌어안기〉에서는 모든 접촉에 커다란 고통을 수반하는 병증에 시달리는 건축학자 파히라가 등장한다. 파히라는 나이가 차서 보육원을 나오게 된 소영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들였고 그녀와 한동안 생활하였다. 하지만 소영은 병으로 인하여 죽었는데, 자신의 통증에 그토록 민감하였던 파히라는 소영의 ‘아프다’는 구조 신호에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였고, 그러한 제 자신을 쉽사리 용서하지 못한다. 


  “행성어 서점이 판매하는 것은 이 행성의 특산품이다. 행성 고유의 언어로 쓰인 ‘해석되지 않는’ 책들. 이 서점의 모든 책은 전자뇌의 통역 모듈을 방해하는 미세 패턴이 새겨진 글자로 인쇄되었다. 아무리 비싼 전뇌 임플란트를 삽입했다고 해도 행성어를 직접 배우지 않는 이상 서점의 책을 읽는 일은 불가능하다.” (p.62, 〈행성어 서점〉 중)


  소설집의 표제작인 〈행성어 서점〉에는 ‘전뇌 임플란트’라는 일종의 자동 번역 시스템을 장착한 (지구를 포함한) 우주인이 등장한다. 물론 주인공은 그러한 전우주적 인간들의 이해를 거부하는 ‘행성어’이다. 최신 스마트폰에는 기본적으로 자동 번역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고, 번역자들이 초벌 번역을 구글 번역기나 디플에 맡기고 있는 현대 기술 사회를 향하여 꽤나 반역적인 소재이다. 


  “... 여행자들은 다 같이 숨을 죽이고 바람 소리, 연필이 긁히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눈앞의 별안개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빛과 그림자가 변화하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람조차 완전히 멈추었고, 정적 사이에 사각사각 무언가를 쓰거나 그리는 소리만이 끼어들었다. 리키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들으며 포착할 수 없는 순간을, 언젠가는 결국 사라지고 말 순간을 지켜보았다.” (p.106, 〈포착되지 않는 풍경〉 중)


  〈포착되지 않는 풍경〉은 말 그대로 사진이란 형태로 포착하려 하면 데이터에 문제를 일으키는 뮬리온-846N 행성의 별안개를 소재로 삼고 있다. 사진이라는 기록 매체에 의해 기록되기를 거부하는 자연 현상인 셈인데, 처음에는 디지털 카메라 그리고 다음에는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인해 모두가 기록자가 되어 버린 현대 사회를 겨낭하고 있다. 이제 행성의 방문자들은 그저 자신의 눈으로만 별안개를 기록한다.


  “가면은 증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미소를 잃었어요. 다음으로 눈물이 없는 슬픔을 잃었고, 비명이 없는 분노를 잃었습니다. 가면은 우리에게서 온갖 종류의 미묘한 감정들을 가져갔답니다. 우리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크게 소리치거나, 울부짖어야 했습니다. 웃을 수는 없었죠. 웃기에는 너무 절망적이었으니까요. 서로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었고, 사랑하던 사람의 얼굴을 다시 볼 수도 없었습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기하학적 문양의 외계 기생물이 시몬에 사는 모든 사람의 얼굴을 대신해버렸어요.” (p.135, 〈시몬을 떠나며〉 중)


  “가면이 우리에게 온 이후로 우리는 억지웃음을 지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가면은 거짓 표정을 만들어내는 대신 서로에게 진짜 다정함을 베풀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게 시몬 사람들이 여전히 가면을 쓰는 이유랍니다.” (p.136, 〈시몬을 떠나며〉 중)


  〈시몬을 떠나며〉에는 가면을 착용하고 살아가는 시몬 행성의 사람들이 있다. 외계 행성에서 도착한 기생생물들이 달라 붙는 바람에 그것들 가면처럼 쓰고 살아야 한다는 설정이 SF적이라면 몇 년 후 그 기생생물에 의한 가면을 제거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 다음에도 계속해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기를 선택했다는 결론은 꽤나 인간적이다. 소설집에는 이런 식의 소설들이 열 네 편 실려 있다.



김초엽 / 최인호 그림 / 행성어 서점 / 마음산책 / 216쪽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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