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9. 2024

박연준 《여름과 루비》

내가 뒤돌아보며 떠나야 했던 흐릿한 기억들 너머에...

  어려서 전학을 많이 다녔다. 초등학교를 네 군데 다녔는데 그 중 세 곳은 대전, 그리고 나머지 한 곳은 포천(하고도 소흘면 송우리)에 위치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자주 학교를 옮겨 다니면 저절로 위축되기 마련이다. 나는 특히나 이름 때문에 애를 먹었다. 선생님들은 내 이름을 쉬이 발음하지 못하였고, 전학생인 내 이름은 항상 마지막에 호명되기 마련이었는데, 나는 일 번이 호명되고 내 차례가 올 때까지 긴 시간동안 마음을 졸였다.


  “... 나는 누군가에 의해 자주 들어올려지고, 불려다녔다. 얼굴이 다 닳은 이파리처럼, 일찍이 시들어 있었다. 주로 고모가 불렀다. 여름! 여름! 이름이 불릴 때마다 아무때고 불리는 여름은 물론, 여름이 아닌 계절들까지도 긴장했으리라. 나는 녹지 않는 여름이었다. 녹을 기회가 없었다.” (p.12)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여름이고, 또 다른 주인공의 이름은 루비이다. 여름이 견디었고 견뎌야 하는 고모의 강퍅한 성격이나 새엄마의 정형화된 성정보다 여름을 향하여 발산되는 루비의 쓸쓸한 감정에 더 눈길이 갔다. 그래서 여름이 보여주는 어린 이율배반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어른들은 싫고 아이들은 모순 덩어리인데, 우리는 그 시절을 통틀어 유년, 이라고 부른다.


  “... 루비는 혼자고, 미움을 받았고, 눈에 띄었는데 그 옆에 설 만큼 나는 가진 게 없었다... 나는 겁을 냈고, 내가 겁낸다는 걸 루비도 알았다. 나는 루비와 루비의 뒤를 쫓는 애들의 뒷모습을 하나의 ’덩어리‘로 봐야 했다. 비겁 때문에, 한 번에 하나의 등을 보지 못했다. 루비는 돌아선 등으로도 볼 수 있었다. 등으로, 자신을 보는 누군가의 등까지 알아보는 아이였다. 그 애를 쫓는 다른 등―작은 흥분으로 늘 뒤틀려 있는―을 보는, 겁먹은 내 등까지도 보았다.” (p.52)


  루비와 같은 친구가 있었나, 뒤를 돌아보다, 내가 루비였나, 고개를 쳐들었다, 거리가 멀다. 겉으로 비치는 나의 모습은 루비와 다르지만 나의 보여주지 못한 모습은 루비와 닮았던 것도 같다. 나는 조금은 조숙하였지만 많이 미숙하였다. 나는 이제 많은 것들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내가 거닐던 복도, 깨진 창으로 들어오던 빛과 책상을 가로지르던 어둠, 그리고 내가 뒤돌아보며 떠나야 했던 교정 같은 것들이 흐릿하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유년이 시절이라는 것. 유년은 ’시절(時節)‘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 멈추거나 끝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컸다고 착각하는 틈을 비집고 돌아와 현재를 헤집어놓는다. 사랑에, 이별에, 지속되는 모든 생활에, 지리멸렬과 환멸로 치환되는 그 모든 숨에 유년이 박혀 있다. 붉음과 빛남을 흉내낸 인조보석처럼. 박혀 있다. 어른의 행동? 그건 유년의 그림자, 유년의 오장육부에 지나지 않는다.” (p.80)


  그럼에도 가끔 모른 척 반짝거리는 것들이 있다. 언제 거기에 있었나 알아차리지 못하면서도 사금파리처럼 따끔거리는 것들이 있다. 끝끝내 시계를 읽지 못하며 슬픈 표정을 지었던 아이와 어쩔 수 없이 한 방을 써야 했던 다음날, 우리는 새벽 운무가 걷히지 않은 놀이터에 나가서 철봉에 매달렸다. 물기가 남아 있고 차갑게 식어 있는 쇠를 붙잡은 채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던가. 


  “이야기를 탐하는 사람은 상처를 재배열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자다. 당신의 피를 내 쪽에 묻혀 희석하려는 욕망. 만약 내게 저들이 앉은 테이블에 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먼저 내 인생의 찢어진 페이지 몇 장에 대해 들려줄 것이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지켜볼 테다. 사람들이 이야기에 상처받는 순간을, 기억과 기억이 만나 상처를 조율해나가는 동안 얼굴에 드리워지는 무늬들을 보고 싶다.” (pp.160~161)  


  허수경의 소설을 몇 권 사놓았는데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집도 거실 책장의 잘 보이는 곳에서 버티는 중이다. 최영미 시인의 《흉터와 무늬》는 오히려 시보다 즐겁게 읽었고,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잠자코 꽂혀 있는 중이다. 《여름과 루비》는 박연준 시인의 첫 번째 소설이다. 한 편의 소설로 유년을 조준하고 있는 시인의 몇몇 문장에 살짝 환호하였다.



박연준 / 여름과 루비 / 은행나무 / 262쪽 / 2022

매거진의 이전글 장류진 외 《여행하는 소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