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 토카르추크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메마른 숲과 외로운 노인과 윌리엄 블레이크와 점성술이 괴이하고 불안하면서

by 우주에부는바람

올가 토카르추크의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읽는 동안, 다른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이 쏟아져 나왔다. 찰스 부코스키의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과 《와인으로 얼룩진 단상들》, 필립 로스의 《위대한 미국소설》, 마거릿 애트우드의 《도덕적 혼란》이 그것들이다. 산문집, 장편소설, 단편소설집으로 장르도 다양하다. 첫 번째 독서가 지지부진하면서 네 권의 책을 동시에, 한꺼번에 오락가락 하며 읽게 되었는데, 결국 올가 토카르추크의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가장 먼저 끝냈다.


“... 어쩌면 그녀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 그러니까 펜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그녀와 같은 인물들은 온전히 자기 자신일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그들은 뭔가를 끊임없이 관찰하는 눈[目]이며, 자신이 보는 모든 문장으로 바꿔 버리는 존재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현실을 끄집어내어 거기서 가장 본질적인 것, 그러니까 말이나 글로는 표현 불가능한 것들을 삭제해 버린다.” (pp.78~79)


소설의 제목인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작시집인 《천국과 지옥의 결혼》 중 <지옥의 격언>에서 따온 말이다. 이를 비롯해 소설 속 열일곱 개 챕터는 모두 윌리엄 블레이크의 싯구로 시작된다. (윌리엄 블레이크를 깊숙이 사용하는 또다른 작품으로는 오에 겐자부로의 연작소설집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를 떠올릴 수 있다.) 소설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신비주의적인 시 그리고 점성술을 통해 진행된다.


“... 그러니 한번 상상해 보자. 국경 저편에 사는 사람들, 부드러우면서 어린아이 같은 언어로 말하는 이 선량한 사람들이 저녁에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난로에 불을 지피고 블레이크를 읽는 모습을. 블레이크가 살아서 이 모든 것을 봤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우주에는 아직 타락하지 않은 곳들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그곳에서 세상은 망가지지 않았고, 에덴동산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거기에서 인류는 어리석고 엄격하기만 한 이성의 법칙이 아니라 마음과 직관의 지배를 받는다. 사람들은 헛소리나 지껄이며, 자기가 이미 아는 것을 뽐내는 데 그치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하며 놀라운 것들을 창조한다. 국가는 더 이상 개인의 일상을 억압하는 족쇄를 채우지 않고, 사람들이 자신의 희망과 꿈을 실현하도록 돕는다. 개인은 기계처럼 돌아가는 시스템의 톱니바퀴나 특정한 역할 수행자에 머물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로 탈바꿈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렇게 누워 있는 게 기쁘게 느껴지기도 했다.

때때로 나는 아픈 사람만이 진정으로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p.124)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른 소설과 비교한다면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메시지와 서사가 모두 선명하다. 자연 생태의 수호와 동물권의 인정이라는 메시지는 매우 직접적으로 전달되는데, 다만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서사의 진행에는 미스터리라는 효과를 부착시키고 있다. “우리에겐 ‘세상을 보는 관점’이 있지만, 동물들에게는 ‘세상을 느끼는 감각’이 있답니다. 아시겠어요?”라는 주인공의 항변은 강렬하고, 소설은 아그니에슈카 홀란드 감독에 의해 <흔적>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봄은 단지 짧은 막간일 뿐이고, 그 뒤에는 강력한 죽음의 군대가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이미 도시의 성벽을 포위하고 있다. 우리는 포위된 상태로 살고 있다. 인생의 한순간을 잘게 쪼개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포에 질려 숨이 막혀 버릴지도 모른다. 몸 안에서 끊임없는 분열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머지않아 병을 앓고, 죽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떠날 것이며, 그들에 대한 기억은 극심한 혼란 속에서 점점 사라질 것이고, 결국엔 옷장 속의옷 몇 벌, 이미 알아볼 수 없게 된 누군가의 사진들만 남을 것이다. 그렇게 가장 소중한 추억은 흩어져 버리고,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자취를 감추겠지.” (pp.179~180)


소설은 고원에서 빈 집들을 관리하며 살아가는 전직 교사 두셰이코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두셰이코는 동네의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고, 오래 전 자신의 제자였던 디오니시오스와 함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번역하며 살아갔다. 하지만 어느 날 스스로 자신의 딸들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던 두 마리의 개가 사라지면서 발원된 의구심이, 그 개들과 다른 동물들이 무참히 살해된 현장 사진을 통해 확인되면서 모든 사건은 시작된다.


“내 나이대 사람에게는, 자신이 정말로 사랑했고 진심으로 귀속되어 있던 장소의 대부분이 더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장소들, 휴가차 들렀던 시골, 첫사랑을 꽃피웠던 불편한 벤치가 있는 공원, 오래된 도시와 카페, 집 들이 이제는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설사 외형이 보존되었더라도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처럼 느껴져서 더욱 고통스럽다.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마치 투옥 상태와도 같다. 내가 보고 있는 지평선이 바로 감방의 벽이다. 그 너머에는 낯설고, 내 것이 아닌, 딴 세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금, 여기밖에는 없다. 모든 앞날이 미지수이고, 도래하지 않은 모든 미래는 공기의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쉽사리 파괴될 수 있는 신기루처럼 투명하다.” (p.230)


고립되어 있는 크지 않은 마을에서 연거푸 벌어지는 몇 건의 살인 사건이라는 형식은 그러나 올가 토카르추크의 아름다운 문장들 안에서 무색하다. 장르적 속성은 아주 살짝 거들뿐 소설은 올가 토카르추크의 문장 안에서 올가 토카르추크의 스타일을 고수하며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거듭되는 반전 같은 것은 없지만 메마른 숲과 외로운 노인과 윌리엄 블레이크와 점성술이 괴이하고 불안하면서도 아름답게 흥미진진하다.



올가 토카르추크 Olga Tokarczuk / 최성은 역 /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Prowadź swoj pług przez kości umarłych) / 민음사 / 392쪽 / 202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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