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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5. 2024

장석주《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무정차로 통과하는 지난 날의 시간을 바라보는 플랫폼...

*2020년 10월 8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추석을 앞두고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두 권 《낮의 집 밤의 집》,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안희경의 대담집인 《오늘부터의 세계》, 로런스 웨슐러의 올리버 색스 평전인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황여정의 소설 《내 이름을 불러줘》 등을 준비했다. 연휴가 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하여, 한가위만큼이나 넉넉한 마음으로 골고루 구매한 셈이다. 그렇지만 언제나처럼 긴 연휴는 쏜살같았다. 아내와 함께 집에서 두물머리까지 65킬로미터를 자전거로 달렸고, 연잎 핫도그를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내의 요청에 의해 경의중앙선을 탔다. 일부러 준비했던 책 중에는 《오늘부터의 세계》를 읽었을 뿐이다. 추석 전에 읽기 시작했던 책 중 옥타비아 버틀러의 《와일드 시드》는 아직 몇 페이지를 남겨 놓고 있고, 장석주의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는 이제야 모두 읽었다.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는 ‘시대를 부유하는 현대인을 위한 사람 공부’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책에는 좋은 공부의 결과물이어서 호응하기에 적당한 좋은 생각들이 많다.



  “... 과거에는 고용주들이 착취자였지만 오늘날 우리를 과다한 노동으로 내모는 것은 성과 강박증에 걸린 우리 자신이다. 철학자 한병철에 따르면 오늘날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는 성과 사회의 병리적 징후 중 일부이다. 성과주의에 빠진 개별자들은 자발적으로 활동성을 늘리면서 스스로를 고갈시킨다... 심심함은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 중 하나다. 심심함 속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행복에 주의를 기울일 수가 있지만, 그것을 잃으면 삶은 바쁜 일과 속에서 잘게 쪼개져 흩어진다... 심심한은 관조하고 사색하는 삶의 필요조건이다. 아울러 심심함은 활동과 사색 사이에 완충 지대를 만든다. 심심함이 없다면, 느릿함 속에서 숙성되는 삶의 의미는 괴지 않고, 당연히 느긋한 여유도, 행복도 신기루같이 사라진다. 심심함을 되찾으라.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래 심심함에 머물라. 그래야만 삶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pp.35~36, <호모 솔리튜도쿠스 Homo solitudocus, 심심함에 대하여> 중)

- 돌이켜 생각해보니 마지막으로 심심해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한병철의 《피로 사회》를 2012년에 읽었는데, 그때도 심심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노예가 되는 ‘성과 사회’라는 개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생각 가득한 과잉의 활동 대신 생각 없는 깊은 사색의 중요성’을 떠올렸는데, 작가가 말하고 있는 ‘심심함’이 거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속도를 섬기고 효율성을 신앙으로 삼는 자본주의는 풍요를 생산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거짓말이다. 자본주의는 욕구를 생산하고, 그 욕구가 만드는 낭비를 장려한다. 필요 이상으로 물건을 만들었으니, 시장에서 소비해야 한다. 소비가 위축된다면 자본주의는 금세 위기에 직면한다.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써라! 이것이 자본주의가 내리는 명령이다. 소비 천국을 선전하는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실제와 당위의 거리가 점점 벌어진다. 나중에는 그 간격이 좋은 삶을 낳을 수 있는 여러 조건을 삼켜 버린다. 자본주의는 포획된 자들을 과잉의 욕구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하다가 죽음으로 몰아간다. 이 욕구가 우리의 것이라는 생각은 착시에서 빚어진 오류다. 우리는 이 타락한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 과잉을 삼키는 욕망 기계, 소비 기계, 정보 처리 기계일 따름이다.” (pp.105~106, <호모 라피엔스 Homo rapiens, 자본주의는 잉여를 생산한다> 중)

- 천박한 자본주의와 오만한 세계화가 결합된 신자유주의에 대해 나는 주로 절망하지만 신랄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미 거기에 저당 잡혀버린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려 간혹 꺼내어 들여다볼 뿐이다. 과대 포장된 모니터 혹은 액정화면 속의 삶에 현혹되지 않으려 애쓰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나와 세계 사이의 간극을 좁혀야 할지 아니면 벌려야 할지 종종 헷갈려하고 있다.



  “... 좋은 책들은 저마다 오래된 영혼의 외침을 들려준다. 독서는 인지적 인내심을 끌어내어 우리 자아를 자기 자신에게로 회귀하게 이끈다. 책을 읽는 경험의 한가운데서 정신의 산만함에서 벗어나 차츰 참다운 자신의 중심을 향해 집중해 나아가는 것, 그 본질적 양태와 마주치는 것, 그것이 독서의 효과이고 보람이다. 인생의 어느 고비에서 만난 책은 우리 인생의 향방을 결정하고, 우리 운명을 빚는 신비한 힘으로 작용한다. 책은 뇌의 회선과 배선을 바꾸고, 불확실성과 불운을 찢고 나아가도록 힘을 북돋우고, 결국은 운명을 바꾼다. 어떤 책을 읽었을 때 우리는 그 책을 읽기 전과 후가 달라진다. 책이 우리의 내면 형질을 바꿔 버리면서 변화의 강력한 촉매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미 문학계의 거장으로 우뚝 선 오에 겐자부로는 이 책(『읽는 인간』)에서 인생의 끝자락에 이르러 얻은 깨달음을 독자에게 고백한다.” (p.255, <호모 부커스 Homo bookus, <책 읽는 인간> 중)

- 오에 겐자부로의 책 《읽는 인간》은 올여름 나의 강릉 여행에 동참한 바 있지만 아직 읽지 못했다. 책상의 왼쪽 모퉁이에 있는데, 다른 책들에 눌려 있다. 읽는 일을 향한 나의 열의는 아직 꺼지지 않고 있다. 다만 쓰는 일을 향한 서툰 노고는 자꾸 뒤처지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사는 것이 참 지긋지긋하다고 몰래 생각하는데, 그러한 생각이 날뛰지 않도록 돕는 것이 바로 나의 책 읽는 행위이다.



  “일상은 시간의 호젓한 만에 있는 표류의 장소, 덧없는 죽음의 자리, 시간이 덧없이 사라지는 표면이다... 이 일상의 안쪽에 욕망과 갈망의 구멍들이 파여 있다. 이 삶의 평평한 국면 속에 작은 죽음들이 숨어 있다. 지구의 지질학적 스케일에 비하면 일상은 아주 작지만 이것은 끊임없이 변화를 불러오는 여러 현상, 사건과 사태를 두루 품는다... 일상 세계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며 되풀이된다. 일상은 의미를 맺지 못한 채 덧없는 반복 속에서 흘러가 사라진다. 일상은 끊임없는 ‘하다’의 세계이다. 그 영역 아래에 그것을 추동하는 욕망과 향락의 열망이 역동한다. 이렇듯 일상은 표명은 잠잠한 듯 보이지만 하부에 꿈틀대는 역동을 품은 채 흘러간다... 우리 일상의 습관과 태도로 결국 삶이라는 하나의 운명이 드러난다. 나는 숙고한다. 어디에선가 와서 어디론가 흘러가는 이 실존과 운명에 대해, 일견 범상해 보이는, 감정이 분출하고 자아가 출현하는 일상 그 자체에 대하여! 하필이면 나는 그 ‘일상’을 숙고한다.” (pp.295~297, <호모 포에티쿠스 Homo poeticus, 일상의 겉과 속> 중)

- 일상에 대한 숙고는 일상의 밖에서가 아니라 일상의 안에서만 가능하다. 일상은 되풀이되지 않는 사건에 기인하는 삶이 가지는 위험인자가 제거된 상태이다. 나는 일상은 뇌관이 제거된 포탄 같은 거라고 여긴다. 평화롭지만 언제든 평화롭지 않을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는 평화다. 나는 죽음의 순간까지 일상이 포기되지 않기를 희망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희망일 뿐이다. 일상은 그렇게 절벽처럼 마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또 아니다. 



  “거실 유리창 밖 허공을 가로질러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저 캄캄한 허공을 가르며 내리는 비는 사천의 밤들과 사천의 낮들이 거느린 빛들을 사살하고 몇 만 년째 저 몸짓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내 곁에는 더 이상 어머니도 아버지도 계시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사랑할 것은 한 줌의 남은 시간, 젖은 들판과 강들, 그리고 조카들처럼 바람에 휘청이는 어린 버드나무들 뿐이다. 머리 위에 지붕이 없고, 발아래 땅이 없다. 비가 허공에 몸을 내던질 때 나 역시 비와 함께 흐른다. 어둠이 깊으면 먼 곳을 바라보라. 새벽이 저 비의 커튼 너머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을 테다.” (pp.376~377, <호모 아쿠아티쿠스 Homo aquaticus, 어느 비 오는 날> 중)

- 허덕이다보니 어느새 가을이 깊어가는 중이다. 나도 따라서, 틈을 주지 않아도 빈틈을 찾아 깊어가고 싶을 정도이다. 구름 한 점 없던 낮을 거쳐 팽창하는 밤의 한 가운데로 도착했다. 나는 머물 곳을 찾아 헤매던 유랑의 시간을 그리워한다. 방금 두고 온 것들을 잊어버리고도 태연자약하던 젊은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들이 문득 이 밤의 플랫폼을 통과하곤 한다. 물론 여기에 정차하는 법은 없다.



장석주 /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 민음사 / 377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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