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굴곡을 따라 이리저리 요령껏 구르면서 살다보니...
*2020년 9월 30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추석을 하루 앞두고 있다. 근처의 부모님 댁에 갈 때는 자전거를 탔는데 올 때는 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추석 전날 이런 비가 내린 적이 있나 싶은 작달비가, 잠시 소강상태가 있었지만 두 차례에 걸쳐 내렸다. 돌아오는 길에 동생의 장인어른을 만났는데 홍제천에 잠시 갇혀 있었다고 했다. 버스 안에는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대화하는 두 명이 있었다. 외국인 처녀는 한국어에 능통했고, 한국인 처녀는 영어에 능통했다.
『창문의 블라인드는 쉽게 잘 쳐지고 잘 걷혔다. 나는 어둠 속에 앉아 창밖의 달을 스치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어느 농가의 부엌, 그리고 그 안에 깨어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나는 실내등을 켜고 밖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숲속에 누군가 있어서 나를 볼지도 모르니까. 그러고 있는 승무원이 내게 와서 나직이 물었다. “뭐 도와드릴까요, 아가씨?” 내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살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자 흐뭇함과 안전함, 그리고 단추를 끝까지 다 채운 느낌이 들었다...』 (p.39)
낮 동안에 내린 비 때문인지 집에 돌아오니 괜스레 안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러니까 위의 가져온 문장 안에 있는 ‘단추를 끝까지 다 채운 느낌’ 같은 것이 잠시 생겼다가 사라졌다. 아내와 나는 나훈아의 콘서트, 다시보기도 재방송도 없다는 콘서트가 하는 시간 동안 심은경이 일본에서 찍었다는 영화 <블루 아워>를 보았다. 사실 나는 그중 삼분의 일 가량은 졸았다. 부모님은 그 시간에 나훈아의 콘서트를 즐겁게 보셨을 것이다.
“학교 수업은 상당히 어려웠다. 우리는 프랑스, 화학, 수학, 물리학 과목도 공부해야 했는데, 스페인어 수업에서는 내가 훗날 대학원에서 읽은 것보다 더 많은 스페인 및 남미 작가들의 소설과 시를 읽었다. 우리는 두 학년에 걸쳐 『돈키호테(Don Quixote)』를 읽으며 매일 각 장에 대해 상세히 토론하는 식의 수업을 했다. 어느 수업에선가 세르반테스(Cervantes)의 한 작중인물이 정신병원에서 자기는 언제고 원하면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대목을 읽은 나는 작가란 아무것이나 원하는 대로 다 쓸 수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p.59)
출간된 루시아 벌린의 두 권의 소설집을 읽었다. 나는 작가의 소설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소개되고 있는 작가의 생 또한 그만치 흥미롭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 《웰컴 홈》 또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가 직접 작성한 생의 일부분은 내가 이미 읽은 소설의 일부분들과 정확하게 겹쳐지기도 했다. 내가 읽은 소설의 애매모호한 결말들은 어쩌면 그것이 부러 꾸미지는 않은 작가의 실제 삶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창고는 축사 옆 큰 헛간 안에 있었다. 이제 비가 사정없이 몰아쳐 모든 게 젖어 있었다. 춥고 젖은 몸으로 우리는 닭똥, 소똥, 말똥, 염소똥에서 풍기는 냄새들까지 견뎌야 했다. 창고는 앉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너무 더러웠고, 데이비드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설사와 구토로 더러워진 모두의 몸만 옷을 찢어 겨우 닦아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버디는 밴 앞자리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격렬하게 몸을 떨면서” (p.111)
게다가 아쉽게도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는 바로 위의 문단으로 끝이 난다. 직접 작성하고자 하였던 에세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자신이 쓸 수 있는 데까지만 쓰고, 작가는 세상을 떠났다. 떠돌 만큼 떠돌고 헤어지고 만나기를 거듭하고 자신에게 남겨진 아이를 장성의 순간까지 키우고 중독에 빠지고 또 벗어나고 학교에서 아이를 가르치고 소설을 쓰고 평생 가지고 살았던 병증에 시달리고도 모자라 암에 걸리는, 남은 생애는 그래서 책에 실리지 못했다.
“나중에 커서 아름답고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면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단다. 하나는 예수님의 생애와 네가 자라면서 읽게 될 많고 많은 훌륭한 책들이냐. 네 엄마도 스승이고 아빠도 스승이지. 모두 네 옆에 있으니(아빠도 조만간 네 옆에 있게 될 거야) 곤란한 상황에 처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생기면 네가 도움을 청할 수 있어. 하지만 누구보다 가장 큰 스승은 네 마음일 거야. 마음이 가볍고 가뿐해서 노래를 부르고 싶어지면 착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란다. 마음이 어둡고 더럽고 창피한 느낌이 들면 무언가 잘못 살고 있다는 뜻이지.” (p.121)
그렇게 실리지 못한 작가의 남은 생을 대신하여 책의 후반부에는 작가의 아버지가 쓴 편지(몇 편) 그리고 작가가 작가가 되는데 큰 영향을 끼친 돈 부부에게 루시아 벌린이 쓴 편지(대부분)가 실려 있다. 아버지가 보냈다는 편지에서 가져온 윗부분을 보면 루시아 벌린이 다사다난한 생의 굴곡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좋은 작품을 쓰며 버틸 수 있었던 힘의 일부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루시아 벌린 Lucia Berlin / 웰컴 홈 (Welcome Home : A Memoir with Selected Photographs and Letters by Lucia Berlin) / 웅진지식하우스 / 263쪽 / 2020 (2003,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