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 로니스 《그날들》

담백하게 기록되고 있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선택할 필요없는 기로...

by 우주에부는바람

*2020년 9월 12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결혼을 한 다음해이던가, 아내가 내 생일을 잊었다. 사실은 나도 잊었는데 아내는 필요 이상으로 미안해하며 받고 싶은 선물이 있는지 물었다. 소니에서 출시된 하이엔드 디지털카메라로 전무후무한 디자인을 선보였던 F707을 (이전에 F505가 있었고 이후에 F717이 있었다) 원한다고 툭 던졌는데 군소리 없이 사주었다. 그 후 소프트한 몇몇 카메라를 거쳐 캐논의 EOS-10D까지 갔는데 거기서 멈췄다.


“가끔은 괜히 사진을 찍어 그 순간을 죽이는 것은 아닐까 두려울 정도로 강렬한 순간이 있다. 내가 의심이 들 때는 바로 그런 순간이다. 나 혼자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아닐까. 그때 그 느낌을 사람들과 과연 온전히 나눌 수 있을까. 그럴 때는 매우 신중해진다. 일정한 거리를 취한다. 이미지가 종이 위에 인쇄되면, 내가 그때 느꼈던 마법이 아직도 살아 있나? 만져지나? 하고 본다. 가끔은 그런 게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P.19)


나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는 손톱만큼도 재능이 없는 아이였지만 창조에의 열정이 부족한 아이는 아니었고, 그 결손에 대한 보상으로 한동안 열심히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가들을 찾아 그들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취미도 갖게 되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그는 누구인가?》는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비싼 책들 중 하나일 테고, 열화당 사진문고의 책들도 몇 권 가지고 있다.


“이런 사진들을 보면 내가 일상 속에, 일상적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데, 바로 그것이 나다. 나는 소설가가 아니다. 나는 무엇도 지어낼 수 없다. 그냥 존재하는 것, 내 눈에 보이는 것, 내 관심을 끄는 것과 함께 있을 뿐이다. 가장 어려운 것은 그것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런 사진들은 신비한 면은 없지만 그 정확한 순간 속으로, 순수한 감정 속으로 온전히 나를 빠지게 만든다. 가만히 멈춰서서 되찾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P.84)


나는 잎이 모두 떨어진 나무의 몸통을 찍는 것 그리고 사람이 앉아 있지 않을 때의 벤치를 찍는 것을 즐겼다. 상처가 생긴 나무에 바짝 붙어 있기도 했고, 내가 방금 찍은 벤치에 앉아서 그 벤치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사진을 찍는 행위도 좋았지만 동행이 없는 그 시간들이 온전히 내 것 같아서 좋기도 했다. 트렁크에는 아직 카메라가 있지만 아마 렌즈에는 곰팡이가 생겼고 배터리는 방전이 되어 있을 것이다.


“사실, 내 사진 인생을 통틀어 내가 가장 붙잡고 싶은 것은 완전히 우연한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은 내가 할 줄 아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나에게 이야기해줄 줄 안다. 내 시선을, 내 감성을 표현해주는 것이다. 사진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뭔가 일어나고 있다. 내 인생은 실망으로 가득차 있으나 커다란 기쁨도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이런 기쁨의 순간을 포착하고 싶다. 삶이 슬그머니 아는 척을 해오면 감사하다. 우연과의 거대한 공모가 있다. 그런 것은 깊이 느껴지는 법이다. 그러면 그것에 감사하자. 내가 ‘의외의 기쁨’이라 명명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머리에 꽂은 핀처럼 사소한 상황들. 바로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뒤에도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늘 준비해야 한다.” (pp.89~90)


언제가 다시 카메라를 들게 될지 모른다. 어린 시절의 고양이 용이는 캐논 카메라에 쩜사 렌즈를 달고 사진을 찍었지만 이후의 고양이들은 스마트폰으로 찍는다. 나는 카메라360 이라는 어플의 LOFT-TIME이라는 필터를 사용한다. 피사체에 집중하는 시간은 최소화되었고 남는 시간에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어리둥절한 채로 살아가는 중이다. 용의주도하고 자극적인 사진들과 가끔 마주치기도 하지만 그 감흥이 오래 가지 않는다.


“그날, 나는 공원이 바로 내다보이는 아내의 방에 있었다. 전망이 매우 아름다웠다. 마리안은 피곤한 기색이었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 방에서 보이는 저 작은 돌벤치 위에 앉아 있는 마리안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을 여름 내내 하면서도, ‘아냐, 조금 더 기다리는 게 좋겠어. 11월이 훨씬 나을 거야’ 하며 기다렸다.

나는 그 사진을 가을에 찍고 싶었다. 땅에 흩어진 낙엽들을 보고 싶었다. 그러면 내 사진이 훨씬 의미가 깊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임박한, 땅으로의 회귀. 나는 기다렸다. 그리고 내가 옳았다. 게다가 마리안은 3년을 더 살았다. 죽은 낙엽들 한가운데, 돌벤치 위에 앉아 있는 아주 작은 그녀를 본다. 이 사진은, 내게 몹시 소중하다. 더 이상은 말할 수가 없다. 마리안은 나뭇잎들의, 자연의 일부다. 풀 속의 작은 곤충처럼.

우리는 46년을 함께 살았다.” (P.147)


사진가인 윌리 로니스의 흑백 사진들과 그 사진들을 찍었던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 담백하여 좋았다. 사진 중에는 어린 파리지앵이라는 제목이 붙은 1952년의 작품이 있는데, 그의 사진 중에서 가장 유명다고 할 수 있다. 윌리 로니스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어린 소년이 자신의 키만 한 바게트 빵을 옆구리에 끼고 환한 미소를 띤 채 달려가는 사진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윌리 로니스 Willy Ronis / 류재화 역 / 그날들 (Ce Jour-Là) / 이봄 / 177쪽 / 2011, 201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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