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설되지 않아 주인 잃은 말들의 주인을 찾아...
엄마 이순일은 일흔 둘이다. 남편 한중언이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이다. 한중언은 네 편의 연작 소설 중 <하고 싶은 말>에서 지나가는 것처럼 잠시 등장할 뿐 다른 소설에서는 비중 있게 발견되지 않는다. 첫째 딸 한영진은 사십대이고 남편 김원상과 두 명의 아이들이 있다. 이순일과 한중언은 한영진의 아래층에 살고 있는데, 그 빌라는 한영진의 시댁의 소유이다. 이순일에게는 둘째 딸 한세진이 있고 막내 아들인 한만수가 있다. 한세진은 미혼이고 한만수는 지금 뉴질랜드에 있다.
「파묘破墓」
”... 그래도 누나, 너무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하지는 마.
그런 거 아냐.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
효?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pp.43~44)
연작 소설로 기획된 소설집이었으므로 이미 읽은 적이 있는 <파묘>를 다시 한 번 읽었다. 소설의 마지막에 딸 한세진과 아들 한만수의 대화가 등장하는데, 딸 한세진은 엄마 이순일과 파묘에 동행한 후이고, 그 사실을 염두에 둔 듯 한만수는 한세진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말한다. 한세진의 이순일을 향한 마음, 그러니까 명확하지 않은 마음을 토대로 하여 발견되는 행동들을 보면서 병든 아버지와 때때로 동행해야 하는 현실의 나를 떠올렸다. 나의 동행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틈틈이 나만 알 수 있도록 도드라지는 감정들에 혼란스러워 하곤 했다. 그 감정들이 어쩌다 곤혹스러워지기도 하였는데, 앞으로는 그럴 때 ‘다만 그거였다’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장면을 찾아볼 작정이다.
「하고 싶은 말」
“... 오늘은 남편보다는 엄마와 대면할 일이 걱정이었다. 한영진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순일에게 묻고 싶은 오랜 질문이. 왜 나를 당신의 밥상 앞에 붙들어두었는가. 한영진은 그러나 그걸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 질문을 들은 이순일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순간을 대면할 용기가 없었다. 이순일은 칠십대였고 일생 아이들을 돌보느라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았다. 아마도 끝까지, 그걸 묻는 순간은 오지 않을 거라고 한영진은 생각했다. 그런 걸 물으면 엄마는 울지도 몰랐고 한영진은 엄마가 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너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어... 기억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누군가의 목소리로 한영진은 그 말을 들은 것 같았다...” (pp.83~84)
<파묘>의 한세진의 마음은 이해가 되고, <하고 싶은 말>의 한영진의 마음도 이해가 가능하다. 갑작스러운 집안의 몰락과 함께 일찌감치 돈을 벌기 시작한 한영진이 이순일을 향하여 갖고 있는 어떤 마음이다.
“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p.70)
한세진과 한영진의 마음을 잠시 비교하여 보는 것도 좋았지만 위의 부분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사람에 대한 이해도 좋았다.
「무명無名」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p.142)
작가는 연작 소설집을 위해 이미 발표된 <파묘>와 <하고 싶은 말> 이외에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무명>과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두 편의 소설을 썼다. <무명>은 두 명의 순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순일이 두 명의 순자 중 한 명이다. 그러니까 소설은 우리가 몰랐던 이순일의 이야기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다가오는 것들>과 이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과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이 그렇게 두 편의 소설을 통해 뒤섞인다.
「다가오는 것들」
“미아 한센뢰베는 「다가오는 것들」에서 로맨스와 화해에 관한 기대를,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실망시키는데, 그게 정말 좋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하미영이 옳다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그것이... 다가오니까.” (pp.182~183)
나중에 알게 된 이순일의 이모 윤부경, 오래전 미국으로 떠났던 윤부경이 아들 노먼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세진은 이순일과 함께 나가서 만난 적이 있다. 이제 나는 미국으로 출장을 간 사이에 그곳에서 노먼의 딸인 제이미를 만난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을 한 번 보아야겠다.
황정은 / 연년세세 (年年歲歲) / 창비 / 187쪽 / 2020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