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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5. 2024

오은 《다독임》

나를 토닥여 소리를 듣고 다독이는 마음으로 향하는...

  위로를 받고 싶을 때도 있고 위로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은 과거로부터 비롯되고, 위로를 해야 한다는 마음은 현재를 건너 미래로 나아가는 움직임 같다. 누군가에게 어깨를 맡겨본 적 오래이다. 누군가의 어깨를 내 쪽으로 당겨본 것도 오래 전 일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싶다. 다독이지도 않고 다독임을 당하지도 않고도 잘 살 수 있어, 오기를 부리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 흔히 미래 지향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과거를 더듬지 않으면, 현재를 응시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매일매일 고개를 돌려 예전을 헤아리는 시간을 가졌다. 나를 크게 웃게도, 많이 울게도 만들었던 것들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것들 때문에, 아니 덕분에 나는 이런 사람이 된 것이다.” (p.5)


  십여 년 전이던가, 퇴근을 한 아내는 나를 향해 쪼르륵 다가오더니 형 한 번만 안아 주세요, 라고 말했다. 나는 놀란 표정을 숨겨 빙그레 웃으며 마른 나무 같은 아내를 안았고, 아내의 견갑골 쪽으로 얼굴을 향한 다음에는 아마도 서글픈 표정이 되었을 것이다. 한동안, 충분한 시간을 들여 그렇게 있은 다음 아내의 신호에 따라 아내를 안고 있던 팔을 풀 수 있었다. 아내는 오래전 푸르렀던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목소리로 이제 됐어, 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 살아가면서 우리는 무수한 ‘우리’를 갖게 된다. 동시에 ‘우리’라는 이름의 ‘우리’에 갇히게 된다. ‘우리’에 포함되지 못해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우리’라는 틀이 싫어서 자발적으로 우리를 떠나는 사람도 있다. ‘우리’라는 말은 개인에게 안온함을 가져다주지만, 책임을 떠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심어줄 수도 있다. 우리가 ‘우리’에 대해 항상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p.43)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조금씩 망쳐 온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젊은 시절에는 가져본 적이 없는 태도이다. 어떤 강박으로부터도 자유롭고자 한 것이 이십대 후반 이후의 나였고, 한동안 그렇게 지냈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흐른 다음 엉뚱하게도 이상한 강박에 이끌렸다. 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착한 사람, 이라는 위장복을 입고 한동안 살았다. 오랜 시간 나와 알고 지낸 선배 둘이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유를 만드는 일, 스스로의 마음에 틈을 내는 일이 점점 더 소중해지고 있다. 쉬는 것이 죄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여유를 능동적으로 찾는 일은 언뜻 뒷걸음질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유를 낼 때에야,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한발 물러섰을 때에야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는 일도,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도 가능해진다. 여유가 나면 사람들은 보통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는 등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 이는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유가 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여유를 내면 그 자리에 의지와 절박함이 들어선다. 여유를 낸다는 것은 다른 것을 할 수도 있는 시간을 나로 향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p.111)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받아들였다. 나이가 드는 일에 수반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여긴 것도 같다. 그러다 점점 호명을 받는 일이 점점 두려워지게도 되었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커졌다. 호명을 받지 않으면 나서지 않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은폐하고 싶다고 소리치는 이율배반의 확성기 같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내가 보고 듣고 겪고 느낀 일이 나의 일상을, 나아가 나의 인생을 구성한다. 개중에 어떤 것은 추억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한때’를 호명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점점 희미해진다. 무수한 ‘한번’을 소환할 때 나는 좀더 나다워진다. 이때 글쓰기는 나를 지키려는 안간힘이자 마침내 나를 지켜내는 작은 기적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이미 쓰고 있는 것이다.” (p.272)


  ‘다독임’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다독임이 필요한 때라는 신호일 수 있다. 책의 내용들이 나를 다독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나의 상태를 조금 구체적으로 떠올려볼 마음이 생기기는 했다. 지쳤는데 어디가 어떻게 지친 것인지 모른 채로 한동안 지내고 있다. 피로감의 정체가 모호하여 멍하니 있고는 한다. 어쨌든 이렇게 한 발 가까이 나를 향하기로 한다. 나를 토닥여 소리를 들어야 나를 다독일 수도 있다.



오은 / 다독임 / 난다 / 277쪽 / 20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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