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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5. 2024

장보영 《아무튼, 산》

스무 여덟 해 전에 시작되어 아직 끝마치지 못한 것 같은...

  우리가 지리산 종주를 감행한 것은 내가 복학을 하고 아내가 대학교 2학년이던 1992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서울지역대학생문학연합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그 결속의 마음을 다잡는 종주였으리라 기억된다. 우리는 서울역에서 느지막이 모여 완행의 기차를 (비둘기호였을까) 타고 (아마도 구례구역으로) 내려갔다. 역에서 내린 다음에는 삼삼오오 택시를 나눠 타고 (아닌가? 버스를 탔을까?) 화엄사로 향했다. 


  “그런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크고 높은 산에 가고 싶다는, 언제나 내 마음 가득 차올라 있던 그 소리를. 나는 생각했다. 산은 눈으로, 추억으로, 상상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심장으로, 가슴으로, 두 다리로 올라야 한다고... 이튿날, 네팔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일주일 뒤에 떠나는 일정이었다...” (p.33)


  시작부터 기억이 희미한 것은 서울역에서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술자리가 도착지까지 계속된 탓이다. 객차와 객차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의 세면장 한켠을 차지한 우리는 카트가 지나갈 때마다 세워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마지막까지 멈추지 못했다. 급기야 역무원은 더 이상 그 열차에 술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항복을 선언했다. 우리 모두는 스물에서 스물다섯 사이의 치기어린 젊은이들이었다.


  “산을 달리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변화라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가벼워지고 작아졌다는 것이다. 산을 달릴 때 필요한 짐을 추리면 먼저 이동 중에 빠르게 먹고 마실 간식과 생수, 기온이 떨어졌을 때를 대비한 방풍재킷, 밤에 필요한 헤드램프와 여분의 배터리, 조난 같은 비상 상황을 위한 호루라기와 깜빡이등, 혹시 모를 부상에 대처할 구급약품 정도다. 그리고 이 모든 장비는 5리터 내니 10리터의 레이스 배낭에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는다. 무겁고 커다란 등산 배낭을 더 이상 찾지 않게 됐다.” (pp.80~81)


  술이 깨지 않은 상태로 화엄사에서 종주를 시작한 것은 기억하지만 정확히 며칠을 걸었는지는 희미하다. 우리는 깨어 있을 때는 걸었고 해가 지면 멈춰 텐트를 치고 잠들었다. 천왕봉에 오르기 전 날 마실 작정인 소주 몇 병이 전부여서 더 이상 술자리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그해 여름은 심한 가뭄 상태였고 우리는 걸으며 먹을 물조차 아껴야 했다. 물로 하는 설거지는 언감생심이어서 신문지로 대충 코펠을 닦아가며 산행을 이어갔던 것이 기억난다. 


  “’문제는 고도(altitude)가 아니라 태도(attitude)’라고 말한 앨버트 머메리. 그의 이름에서 유래하는 머메리즘이란 등정주의를 가리키는 알피니즘이 아니라 보다 어렵고 다양한 루트로 오르는 것을 중시하는 등로주의를 뜻한다. 그는 산행의 본질은 정상을 오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있다고 했다. 고도가 아니라 태도...” (pp.91~92)


  천왕봉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보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도 삼대가 덕을 쌓아야 일출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빠른 하산 코스로 백무동 계곡을 택했는데, 바짝 마른 그곳의 바위들을 뛰어 내려오다 무릎의 십자 인대에 탈이 났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나를 동기였던 L과 L이 부축해주었다. 둘의 도움을 받으며 겨우 내려와 남원의 어느 식당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었다, 막걸리와 함께. 


  “산을 처음 오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바라던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외부의 욕망이 아닌 내면의 본성을 따르며, 내 안의 순수를 지키며, 본연의 나를 인정하며, 그렇게 소박하게 위대하게 살아가는 것...” (p.137)


  서울역에 도착하여 아스팔트 광장에서 그만 뻗어버렸다. 배낭을 배고 누워 잠시 잠이 들었는데 옆에 벗어 놓았던 등산화 한 짝을 도둑맞았다. 왜 한 짝만 훔쳐간 것인지 어이없어 하는 동안, 지금의 아내인 그때의 후배가 서울역 근처의 신발 가게에서 슬리퍼를 사다 주었다. 그때의 후배인 지금의 아내가 얼마 전 트레일 러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 걸으면서도 지쳤던 우리가 지금 달릴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기는 하였다.



장보영 / 아무튼, 산 / 코난북스 / 147쪽 / 20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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