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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8. 2024

정지돈 《내가 싸우듯이》

끊임없이 의구심 품게 만드는 인물, 저자, 책의 향연... 

  「눈먼 부엉이」 

  “우리는 집 안 곳곳에 산재해 있는 장의 책을 모조리 뒤졌지만 ‘투명한 아름다움이 빛나는’ 책 따위는 찾지 못했다. 에리크는 옷과 책과 곰팡이로 난장판인 작은 방을 가리키며 손님방이냐고 했다. 나는 ‘노’라고(분명 ‘노’라고) 대답했는데, 에리크는 괜찮다고 하더니 짐을 풀었다. 나는 뭐가 괜찮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지만 어쨌든 짐 푸는 걸 도왔다.” (pp.18~19)작가의 소설을 읽다보면 이런 정도의 유머에도 꽤나 크게 웃게 된다. 그건 그렇고 소설에서 거론되고 있는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를 나는 《눈먼 올빼미》라는 제목의 책으로 읽었고, 책의 정장이 인상적이었다는 그리고 손에 꼽을 만한 인상적인 문장으로 가득했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뉴욕에서 온 사나이」

  “나는 기억을 잃어버렸다. 뉴욕에서 귀국한 날에 교통사고가 났고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의사는 기억의 일부가 손상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돌아올 것이고 일부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그 일부가 어떤 것이 될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건 전적으로 운에 달린 일이라고 했다.” (p.39) 나의 손상된 기억에는 내가 쓴 〈말라노체〉라는 단편소설이 있고, 이성애자인 나와 사랑을 나눴던 레이날도 아레나스가 있다.


  「창백한 말」

  소설집은 두 개의 큰 챕터로 나눠져 있고 첫 번째 챕터 ‘장’에는 〈창백한 말〉을 비롯하여 〈눈먼 부엉이〉, 〈뉴욕에서 온 사나이〉, 〈미래의 책〉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작품들보다 〈창백한 말〉에서 장은 좀더 주도적인 3인칭으로 등장한다. “장이 가장 관심을 가진 주제는 이상과 허무의 관계였다. 장이 말했다. 21세기는 허무의 시대다. 그러나 가짜 허무의 시대다. 그는 진정한 이상주의자만이 진정한 허무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진정한 이상주의자도 아니었고, 진정한 허무주의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진정한 주의자라는 게 진정으로 존재할 수나 있긴 한가. 그런 것에 누가 관심을 가지는가. 장은 옛날 책과 영화를 너무 봤고 어느 순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pp.75~76)

 

  「미래의 책」

  ‘한국 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하는 한국 남자와 사랑’에 빠졌던 남자 알랭은 한국에 와서 프랑스 출신의 문학평론가로 활동 하다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간 다음 교통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주말」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약속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책은 어디서나 읽을 수 있고 언제나 덮을 수 있다. 나는 책을 한 번에 세 페이지 이상 읽는 일이 드물다. 좋은 책은 대부분 세 페에지 안에 좋은 부분이 나온다. 또는 세 페이지 안에서 좋음을 얻는다. 그렇다면 더 이상 독서를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책을 덮는다. 좋지 않은 책은 세 페이지가 넘도록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책을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있을까. 나는 책을 덮는다. 책과 달리 영화와 공연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p.125) 이래 놓고 소설의 많은 부분을 영화에 할애한다.


  「건축이냐 혁명이냐」

  “이구는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우크라이나 처녀 줄리아 멀록을 데리고 긴즈버그의 낭독회에 갔고, 집으로 오는 길에 건축은 땅 위에 시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말로 환심을 산 뒤 나는 대한민국의 황족입니다,라는 말로 그녀를 웃겼다. 한 해 뒤, 이구와 줄리아는 진 다니를 증인으로 세우고 브루클린의 성당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으며, 하와이로 신혼 여행을 떠났다.” (p.156) 그러니가 이구는 정말 황족이고, 건축가였다. 진실이라는 내피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라고 부러 외치는 듯한 사실이라는 외피의 향연... 작가의 대부분의 소설에서 그렇다. 정말 진실이 중요해, 라고 계속해서 묻는 듯한 사실의 포격...


  「나는 카페 웨이터처럼 산다」

  “만약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삶이 아닌 것을 더 이상 구분하지 못한다면” (p.216) 갑자기 조르주 페렉이 떠올랐다.


  「여행자들의 지침서」

  “사이먼은 톰에게 소설을 써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톰이 그에게 고민 상담을 했기 때문이다. 톰은 당시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열심히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 기이한 열정이 있어 아무것도 참지 못하거나 또는 참지 못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고 했다. 사이먼은 알아듣지 못했다. 톰이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저는 어떤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데 사실 꾸준히 하지 않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p.234) 그리고 톰은 소설을 썼다.


  「만나는 장소는 변하지 않는다」

  “... 우리는 우리를 상대로 싸웠고, 우리에게 우리는 없었다. 우리는 안에서부터 파열됐고 가끔 협력했지만 대부분 배신했다. 수르코프는 푸틴에게 내쳐졌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해빙기 러시아 최고의 광고쟁이이자 ‘모던 아트의 충실한 종’이었으며 국제적인 스타였고 새로운 세계의 디자이너였다. 크렘린의 회색 추기경은 임시직이었을 뿐이다. 우리에겐 새로운 형태의 삶이 필요해. 수르코프는 생각했다. 저는 긴즈버그와 마릴린 먼로와 히틀러를 사랑하고 금융업에 종사하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콜라보한 사람입니다...” (p.274) 작가의 소설을 읽다보면 이런 사람이 진짜 있어, 이런 작가가 정말 있어, 이런 책이 실제로 있어, 라는 의구심을 끊임없이 품게 되는데, 진짜 정말 실제로 다들 있다.



정지돈 / 내가 싸우듯이 / 문학과지성사 / 315쪽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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