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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8. 2024

정지돈 《인생연구》

챗GPT의 시대에 만약 보르헤스가 소환된다면...

  「우리의 스크린은 서로를 바라본다」

  안젤라는 내 친구 도엽의 여자친구였다. 나는 이들 연인과 한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들이 헤어진 다음에는 안젤라와 함께 남은 기간 동안 그 집에서 살아야 했다. ”... 안젤라는 모든 사람의 삶은 닮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생판 다른 거 같고 이해할 수 없어도 사실 같은 거라고, 한 사람의 인생은 모든 사람의 인생이라고, 본질적으로 우리는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pp.29~30) 이후 드물게 안젤라와 연락이 닿았고 마지막에는 안젤라의 부탁으로 나를 방문한 친친에게 노트북과 하드를 넘겨준다. 


  「괜찮아, 목요일에 다시 들를게」

  『... 조 칩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아버지에게 떠밀려 뉴욕에 갔다가 각성(조 칩의 표현이다)했단다. 지금은 홍대 미학과에 다니며 밴드를 하는데(멤버가 몇 명이냐고 묻자 혼자라고, 당연한 거 아니냐는 식으로 대답했다) 시간 나면 스튜디오에 놀러오라고 했다. 친구들과 함께 사용하는 작업실 겸 스튜디오로 가끔 거기서 의식도 한다는 거였다. ”무슨 의식?“ 내가 물었다. 조 칩이 내 등을 툭 쳤다. ”새끼 여전하네.“』 (pp.44~45)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은 ’그게 다였다‘인데, 바로 이 부분을 통해 조 칩이라는 인물 그리고 조 칩 이후에 더 이상 말을 가져다 붙이지 못하는 나라는 인물의 성격아 확 와닿는다.


  「B! D! F! W!」

  ”내가 졸업영화 촬영 에피소드를 소설로 쓰겠다고 하자 진양은 그게 소설 거리가 되냐고 물었다. 니 소설은 훨씬 더 난해하고 추상적인 무언가를 다루지 않느냐고 말이다. 나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내 소설은 언제나 현실에 기반해. 내가 말했다.“ (p.103) 책에 실린 소설들에는 소설을 쓰는 내가 종종 등장한다. 정지돈의 소설들에는 좀처럼 현실감이 없다. 그런데도 ’내 소설은 언제나 현실에 기반해‘라는 말이 그저 반어법으로만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 현실이라는 게 그것 참...

 

  「나, 슈프림」

  ”타자를 치는 것은 인간적이지 않은 일이고, 사이버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은 실체를 잃는 것이다. 사실상 모든 것이 허위와 소외이며, 실체의 형편없는 대안이다. 그러므로 사이버 공간은 의미 있는 우정의 근원이 될 수 없다.“ (p.106, 그레천 매컬러 『인터넷 때문에』 중 재인용) 작가의 특징적인 글쓰기는 저게 진짜 작가야, 저게 진짜 작품이야, 싶은 것들을 퀼트처럼 기워 우리 앞에 짜잔, 내놓는다는 것이다. 이걸 믿어야 돼, 말아야 돼, 하면서 계속 보게되는 데, 글맛이 있기 때문이다.


  「베티 블루」

  ”... 형편이 안 좋으면 다 안 좋다. 어머니가 말했다. 우야겠노. 어머니의 형편은 경제 사정이나 계급이 아니었고 성격이나 가족 관계도 아니었으며, 운명, 사주도 아닌 그것들이 어찌 어찌 돌아가는 형세 같은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걸 좋게 만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형편이 어느 정도여야 좋은 건지, 어머니는 이 정도면 당신의 형편이 좋은 거라고 종종 생각하기도 했다. 형편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형편은 비교라는 걸,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사람에겐 형편이랄 게 없고, 사회가 형성되고 그것들이 어떤 관계를 이룰 때 존재한다는 걸.“ (pp.184~185) 책의 모든 부분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문장들의 집합이라고 본다.


  「해저생활」

  목욕탕에서 책을 읽는 취미를 가지고 있던 나, 탕에서 마주치게 된 야구선수 양준혁, 그 양준혁에게서 사인을 받아주기 위하여 고군분투 하였던 석이 아저씨... 그러니까 소설은 나와 양준혁이 아니라 석이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가 수술을 위한 구부러진 공간에서」

  ”... 배리는 말한다. 텔레파시가 통하듯, 언어의 깊숙한 내면, 우리 겉모습의 반대편에 진실로 구조화된 평행세계가 있고 갈라진 틈새로 그곳을 엿볼 수 있다고, 일순간에 불과할지라도, 그곳을 보거나 듣고 경험하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할 거라고. 찰나에 본 빛을 따라, 꿈에서 들린 음성을 좇아 평생을 살 거라고.“ (p.213) ‘철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이고 뮤지션이고 민족지학자이고 콰메 은쿠르나의 당원이었으며 시크교도였고 다큐멘터리스트이고 저글링 선수이며 아마추어 전쟁게이머’인 흑인 청년 에슈나에슌과 이를 한국에 처음 소개한 배리 보바, 그리고 이러한 배리 보바의 글에 파묻혀 지낸 적이 있는 나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

 ”러브레이스 테스트라는 인공지능 시험이 있다. 인류 최초의 코드 작성자인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이름을 딴 이 테스트는 튜링 테스트처럼 유명하진 않지만, 여러면에서 생각해볼 만한 점을 시사한다. 러브레이스 테스트를 발명한 연구진은 테스트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이 설계한 인공 행위자가 결과물(예를 들면 단편소설)을 내놓는다. 이 창조의 과정은 재현 가능해야 하고(하드웨어 오류로 우연히 생긴 결과가 아니어야 하고), 이 행위자를 설계한 인간은 행위자가 그 결과물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p.254) 지금 이 시대, 그러니까 챗GPT의 시대에 만약 보르헤스와 같은 이가 존재하였다면 어떠했을까...



정지돈 / 인생연구 / 창비 / 272쪽 /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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