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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형 <붕대 감기>

새로운 페미니즘을 향하는 작가의 시선이 다다른 중간 경유지 같은...

by 우주에부는바람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고 군대에 갔다 온 90년대 이후에야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적 페미니즘, 그리고 그에 대해 비판적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이나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을 일련의 찌라시로 읽을 수 있었다. 여성주의 잡지라고 할 수 있는 <이프(IF)>는 1997년에 출간되었는데, 여기서 ‘IF’는 Infinite Feminist, I'm a Feminist의 약어, 이다.


“매번 손님들에게 톡을 보내 영양제 서비스를 받고 계절이 바뀌었으니 최신 유행 스타일의 파마를, 염색을, 헤어매니큐어를 하라고 권할 때마다 지현의 내면은 분열되었다. 한쪽에는 지금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이 말도 안 되게 지나친 생각이고, 자신이 하는 일이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 순수한 작업이며, 하나의 예술이기도 하다는 자긍심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는 자괴감이 있었다. 미용실에 커플끼리 온 사람들을 볼 때면 자괴감 쪽이 커졌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어버려서 지현은 괴로웠다. 왜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함께 온 남자친구의 허락을 받아야 긴머리를 짧게 자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남자들은 대체로 안 된다고 했고, 그러면 여자들은 그냥 머리끝을 다듬거나 귀여워 보이는 파마를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갔다.” (pp.37~38)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과거의 여성주의와 구분되는) 여성주의 운동은 90년대 이후 온라인과 결합되하며 2000년대 영페미니즘의 등장으로 이어졌고, 2015년 메갈리아의 등장과 함께 이제는 영영페미니즘의 시대로 이어지고 있다, 라는 기사를 살핀다. 내가 찌라시를 살펴보던 때로부터 최소한 두 세대 정도의 무브먼트 진화가 있었던 셈이고, 나는 아직 저 멀리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아이는 아직 모른다. 달착지근한 마카롱 몇 개나 갑작스럽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 같은 것으로는 괜찮아지지 않는 일들이 세상에 아주 많다는 것을.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일이 점점 더 겁나는 모험처럼 느껴진다. 결과가 안 좋을 때가 더 많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고, 그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굳이 물어보았다. 나 역시 누군가가 그렇게 물어주기를, 종종 장마가 비를 기다리듯이 기다리게 되므로.’ (pp.55~56)


다양한 여성주의 운동에 대해 원론적인 지지를 하지만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는 못한 채 살아왔다. 관련 사안에 대해 아내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할 때도 있지만 큰 싸움으로 번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남녀이자 아내와 남편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터득한 기술 덕분이기도 하고, 공부를 하지 않아 무뎌진 논리(로 인해 싸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니) 덕분이기도 하다.


“받지 않은 질문에 대답하고 싶기도 했다. 네가 전에 말했었잖아. 여자들 사이에 갈등이 커져가고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이야. 너는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때 너의 말을 듣고서야 그런 게 있다는 걸 알고 정말 많이 놀랐어... 그것에 대해 무엇을 느낄 만한 자리 자체가 내 삶에는 없다는 걸 네가 이해하게 되면 더 놀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사실이야. 내가 삶으로 꽉 차서 폭발해버리지 않게 하려면 나는 나의 어떤 부분을 헐어서 공간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렇게 얻어낸 공간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부정적 감정을 채울 수는 없다는 것,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전혀 모르고 내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 사람들을 존중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미움을 집어넣을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 그게 내가 해낼 수 있었던 최선의 생각이야. 내가 아는 사람들,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들어가면 그 자리는 꽉 차버리는걸.” (pp.63~64)


소설은 (요즘) 페미니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남과 여의 대립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 그러니까 소설에는 다양한 여성들만이 등장한다. 소설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고등학교 동창인 세연과 진경인데, 두 사람을 보면 (조금은 거칠게)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어쩌면 진경은 여자의 적은 여자, 라고 할 때 뒤의 ‘여자’에 해당하고, 세연은 앞의 ‘여자’인 여성 일반의 권리 신장을 위해 애를 쓰는 인물이다.


“진경은 겨울일 뿐이었다. 진경을 보며 진경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을, 27년 전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 붕대를 들고 서 있던, 단지 완전히 성숙하지 못했고, 누군가와 이어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어서 엉거주춤 서 있던 어린 자신을, 세연은 한 없이 미워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도,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게.” (p.142)


이외에도 소설에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인식하는 미용사 지현과 미용실의 실장인 해미, 성폭력 피해자인 제자 채이를 도왔던 경혜와 기성 페미니스트를 비판하는 형은 등이 등장한다. 이들 사이의 관계 또한 남과 여라는 대립 관계가 아니라 여와 여라는 대응 관계 속에서 그려지고 있다. 페미니즘의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시대의 페미니즘을 가리키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거쳐 가고 있는 중간 경유지 같은 소설이 아닐까 싶다.


윤이형 / 붕대 감기 / 작가정신 / 199쪽 / 20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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