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어지지 못하는 스펙트럼의 자장 안에서 서로를 끌어당기는...
강화길 「음복(飮福)」
“왜냐하면 너는 아마 영원히 모를 테니까. 뭔가를 모르는 너. 누군가를 미워해본 적도 없고, 미움 받는다는 것을 알아챈 적도 없는 사람. 잘못을 바로 시인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 너는 코스모스를 꺾은 이유가 사실 당신 때문이라는 걸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고, 누가 나를 이해해주냐는 외침을 언젠가 돌려주고 말겠다는 비릿한 증오를 품은 사람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지. 그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 아니야. 그래.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했어. 지금도 사랑한다. 때문에 나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네가 진짜 악역이라는 것을.” (p.38) 남편을 따라 시댁에서 치르는 제사가 있는 날, 그곳에서 나는 남편의 고모가 그 집의 악역을 하는 인물임을 알아챈다. 하지만 남편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지금까지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어느 날 퇴근하던 길, 나는 그녀를 마음속으로 부르고 긴 숨을 내쉬었다. 나의 숨은 흰 수증기가 되어 공중에서 흩어졌다. 나는 그때 내가 겨울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겨울은 사람의 숨이 눈으로 보이는 유일한 계절이니까. 언젠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며 긴 숨을 내쉬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보일 것처럼 떠올랐다.” (p.87) 선생님과 학생으로 만난 그녀와 내가 교차하던 몇 개의 장면이 점점이 놓여져 있고, 그 장면들은 먼 훗날, 내가 바로 그녀의 자리에 있다고 여겨지는 순간을 향하여 훅, 다가오게 된다.
김봉곤 「그런 생활」
“저는 외골수가 아닙니다. 저는 눈치를 아주 많이 보고, 또 모든 것을 파악하길 원하고 알고 싶어합니다. 모든 것이 밝혀지길 바라고 투명하길 바랍니다. 저는 비밀이 없었으면 좋겠고 거짓말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말해도 좋을 공간으로 소설 외의 것을 저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믄 산문의 잡식성은 그 구질구질함을 견뎌낼 수만 있다면, 제가 기꺼이 하고 싶은 일이며, 그렇기에 제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산문은 제게 가장 자유로운 예술 장르입니다.” (p.145) 이렇게 말한 다음 문단은 ‘하지만’이라는 접속사로 시작된다. 사실 소설은 이 ‘하지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너무도 솔직하게 말하는 작가의 ‘그런’ 생활로 가득하다. “꿈인지 생각인지 혼미한 문장-풍경 사이로 여름을 예비하는 작은 잎들이 내 눈앞에서 세차게 흔들렸다. 나는 여름의 춤, 이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어쩌면 이것이 이 소설의 제목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제목은 그런 생활이 될 것이며, 그건 내가 바로 그런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읽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썼고, 때로는 그들만이 내 글을 읽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쓰지 않는 동안에도 나는 그런 글을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했고, 그런 생활을 했다.” (p.151)
이현석 「다른 세계에서도」
동생 해수의 임신과 낙태죄의 위헌 판결을 받기 위해 노력했던 친한 언니와 그런 언니의 요청으로 모임에 참가했던 나... 나는 그러나 모임이 계속되는 동안 언니 그리고 모임의 주류인 어떤 생각에 반감을 품게 된다. 그리고 나와 동생이 소설의 말미에 나누는 대화 끝에 나오는 말, “그럼. 나도 우리가 행복했으면 좋겠어.”라는 말로 많은 것이 수렴된다.
김초엽 「인지 공간」
작가의 단행본을 사놓은지 오래인데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같은 책을 연거푸 사서 한 권은 후배에게 넘기기까지 했는데도. 소설은 ‘인지 공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물질적인 하나의 세계로 구현하는데 공을 들이고 있다. 요즘의 SF 장르가 가지는 추세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작가는 그에 부합하는 글을 쓰고 있다고 여겨진다. 신비하기 보다는 과학적이고, 환상적이기 보다는 물리적인 어떤...
장류진 「연수」
운전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그런 장롱 면허를 소생하기 위해 받게 된 연수에서 만난 선생과의 드라이브들... 별다른 내용이 없이 연수를 받는 나와 연수를 하는 그녀의, 그야말로 디테일한 연수 과정으로 채워져 있는데 소설인데, 도 읽을만 하다.
장희원 「우리(畜舍)의 환대」
재현과 아내는 호주의 남서부 끝자락 퍼스라는 곳에 머물고 있는 아들 영재를 찾아간다. 아들 영재의 성적 정체성을 향하여 불같이 화를 낸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재현은 도착한 호주에서 영재가 소속된 의사 가족, 그러니까 영재와 흑인 노인과 스무 살 민영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모습에 의아할 뿐이다. 그렇게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소설의 제목에 아이러니의 방식으로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강화길, 최은영, 김봉곤, 이현석, 김초엽, 장류진, 장희원 /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문학동네 / 374쪽 / 2020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