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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6. 2024

김영하 <오래 준비해온 대답>

바뀌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바뀐 것들의 홀연함...

  《오래 준비해운 대답》은 2009년에 출간되었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의 개정판이다. 김영하는 원고를 다듬었고 현지음식 요리법 꼭지를 새로 추가했다. 나는 이미 2009년에 이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이 그 책이라는 사실을 몰라 책을 다시 샀고, 어쨌든 이 책을 다시 읽기로 했다. 이 책을 읽기에 앞서 그 책을 읽고 내가 작성했던 리뷰를 찾아볼까 하다가, 일부러 읽지 않았다. 


  “농장에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남자들이 맥주를 마시며 쉬고 있었다. 몰타에서부터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고 했다. 몰타가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던 덕에 영어가 유창했다. 남자들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사이 프랑스에서 온 두 명의 남녀는 레몬나무 아래에서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조용히 자기들만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선남선녀였다. 골초인 남자는 저녁을 먹는 내내 밖을 들락거렸다. 우리는 모두 벽에 프레스코화가 그려진 식당에서 함께 같은 메뉴의 밥을 먹었다. 토니라는 이름을 가진 크고 순한 개가 들어왔다가 주인이 꾸짖자 물러나 문 앞에 벌렁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프랑스인 남자가 걸어가 목을 쓰다듬자 개가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p.173) 


  이 책을 모두 읽고나서야 그 때의 리뷰를 찾아보았는데, 내가 그때 인용한 문구들과 이번에 내가 책을 읽으며 체크한 문구는 하나도 겹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위와 같은 담백한 문장을 좋아하는데, 주인에게 혼이 나고 물러났던 순한 개가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감는 사이에 프랑스인 남자의 쓰다듬이 은근히 끼어드는 것과 같은 문장, 그때의 나는 그렇지 않았나, 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 그 자리에 앉기 전까지는 나는 한 번도 시칠리아에 가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었다. 거긴 어쩐지 내가 영원히 갈 수 없는 곳, 그린란드나 남극 같은 곳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시칠리아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시칠리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주 피상적인 것들뿐이었다. 그곳은 <대부>의 돈 코를레오네의 고향이고 <시네마 천국>의 토토가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다. 척박하고 메마른 땅에 검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살고 있으며 거친 사내들이 배를 타고 자기 운명을 개척하러 떠나는 곳이다. 팔레르모라는 도시에서 영화제가 열린다는 것, 평론가 김현이 90년대에 『시칠리아의 암소』라는 평론집을 냈다는 것 정도가 내가 그 섬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p.41)


  책의 달라진 부분을 찾는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때의 제목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가 페리가 떠나는 터미널의 보세구역 입구에서 발견한 ‘Memory Lost’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번의 제목 ‘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작가의 최초의 시칠리아 여행이 시작된 갑작스러운 대답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많은 것들은 갑작스럽게 등장하지만, 그 홀연한 등장은 때때로 홀연한 사라짐과 등치를 이루곤 한다. 


  “가이드북 보니까 이탈리아에 이런 속담이 있대. 사랑은 무엇이나 가능하게 한다. 돈은 모든 것을 이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것을 끝장낸다.” (pp.287~288)


  이 여행에는 작가의 아내가 동행하고 있지만 글의 전면에 등장하는 법은 없다. 하지만 일종의 반면교사인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고 있음을 넌지시 드러내는 글은 아주 많았다. 작가는 함께 여행하는 아내를 의식하고 이러한 의식이 의지가 되어 문제를 해결하고는 한다. 서로 다른 인간형의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일은 서로 다른 인간형의 두 사람이 함께 여행을 하는 일과 다르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 정말 젊은 사람들은 젊은이의 옷을 입는 사람이 아니라 젊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젊게 생각한다는 것은 늙은이들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늙은이들은 걱정이 많고 신중하여 어디로든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반면 젊은이들은 자신의 취향도 내세우지 않으며 낯선 곳에서 받는 새로운 감흥을 거리낌없이, 아무 거부감 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더 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호기심은 한편 피곤한 감정이다. 우리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든 질문하게 하고 이미 알려진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니까.” (p.297)


  나(나 아내)는 여행에 목말라 하지 않는 타입이라고 생각하지만 간혹 그게 정말인가 되짚어보기도 한다. 아내는 불편한 것을 싫어하고 나는 뻔한 것을 싫어한다. 너무 많은 여행 서적을 읽다보니 많은 것이 뻔해져버렸다. 내 발로 딛고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세계가 한가득인데도 그렇다. 책을 읽는 동안 시칠리아를 검색했는데, 이탈리아 반도가 뻥 차고 있는 그 섬이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김영하 / 오래 준비해온 대답 / 복복서가 / 298쪽 / 2020 (200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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