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목과 학살과 경원시를 뛰어넘어 '안줌'과 '틸로'의 품 안으로...
과작도 이런 과작이 없다. 아룬다티 로이는 1997년 《작은 것들의 신》을 발표했고 부커상을 수상했다. 이후 아룬다티 로이는 사회 운동가로 활동하며 에세이를 썼지만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는 내 추천 리스트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책들 중 하나이다) 소설은 발표하지 않다가 2017년 그러니까 《작은 것들의 신》 이후 이십여 년이 지난 시점에 새로운 소설 《지복의 성자》를 발표했다.
“비루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일단 벼랑 끝에서 떨어지면 추락을 멈출 수 없어... 그리고 우리는 추락하면서 역시 추락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매달리게 되지. 그 사실은 빨리 깨달을수록 좋아. 우리가 사는 여기 이곳. 우리가 보금자리로 삼은 이곳은 추락하는 사람들의 집이야. 여기엔 하키카트(현실)가 없어. 이봐,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현실이 아냐. 우린 진짜로 존재하는 게 아냐.” (pp.117~118)
이십여 년의 공백을 두고 발표되었지만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이 전달하는 감정의 풍광의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소설은 안줌과 틸로라는 두 여성의 탄생과 이후의 삶의 여정 전반을 아우르는데, 이 두 인물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슬픔(안줌은 남성의 성기 아래에 여성의 성기가 달려 있었고, 틸로는 엄마에게 버려졌다가 다시 그 엄마에게 입양되어야 했다)도 이후의 드라마도 (안줌은 묘지에서 살아가고, 틸로는 카슈미르 지역의 반란군을 돕는다) 장관이다.
“...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문제다. 우리 중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요즘 아주 크게 부상한 다른 문제도 있다. 사람들 – 공동체, 계급, 민족, 그리고 심지어 국가까지도 – 은 자신들의 비극적 역사와 불행을 트로피처럼, 혹은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처럼 지니고 다닌다. 유감스럽게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비극이 없는 인간이라 거래할 상품이 없다. 나는 상류계급, 어느 모로 보나 상류계급의 압제자다.” (p.259)
양성구유의 몸으로 태어나 결국 히즈라 공동체에 들어가고 구자라트의 이슬람교도 학살 사건 현장을 목도하고 결국 묘지에 둥지를 튼 안줌이 소설의 전반부에 배치되어 있고, 안줌과 틸로는 어느 시위 현장에서 미스 제빈 2세로 불리우는 아기를 통해 연결되고, 틸로는 바통을 이어받아 대학 시절의 연극을 통해 만난 네 친구의 (틸로를 비롯해 무사, 나가, 가슨 호바트까지) 이야기를 통해 소설의 후반부를 이끌어간다.
“문제의 폭발음은 옆 도로에서 빈 망고 프루티 용기가 승용차에 깔리면서 난 소리임이 후에 밝혀졌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망고 푸르티(신선하고 진한) 용기를 길에 버린 사람? 인도? 카슈미르? 파키스탄? 승용차 운전자? 대학살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사실들은 입증되지 못했다.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그게 카슈미르였다. 그건 카슈미르 탓이었다.
삶은 계속되었다. 죽음도 계속되었다. 전쟁도 계속되었다.” (p.428)
종교와 종교가 극악스럽게 반목하고, 국가와 국가가 치열하게 갈라지고, 카스트 제도는 여전히 남아 서로를 경원시하고, 학살의 기억이 여전한 지역들이 존재하는 인도 아대륙을 공간으로 삼고 있는 소설은 역사적인 사실에 기반을 둔 채로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소설 속 많은 장면들의 긴장감은 이러한 역사성에 기인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몇몇 인물들이 갖는 환상적인 요소는 이러한 역사성과 부딪치며 메아리처럼 소설을 풍성하게 만들기도 한다.
“지하나라 베굼의 아들은 딸이 되었고, 왕쥐는 이제 신부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바닥도 붉고, 벽도 붉고, 천장도 붉었다. 하즈라트 사르마드의 피는 아직도 씻기지 않았다... 안줌은 기도를 올린 후 사르마드에게 젊은 부부를 축복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리고 사라마드 – 지복至福의 성자이자, 위로받지 못한 자들의 성인이며,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자들, 신자들 속의 신성모독자, 신성모독자들 속 신자의 위안慰安인 – 는 그렇게 해주었다.” (p.544)
소설은 성적으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지역적으로 주류가 아닌 이들의 삶에 전적으로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이들은 비주류로 밀려나다가 결국 추락해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위치에 있고 작가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 손을 붙잡으라고 독려하는 것만 같다. 소설 속 안줌과 틸로는 이미 그렇게 연대를 하고 있고, 그렇게 안줌과 틸로를 붙잡은 독자들의 손도 책을 읽는 동안 여간해서는 힘이 풀리지 않는다.
아룬다티 로이 Arundhati Roy / 민승남 역 / 지복의 성자 (The MINISTRY of UTMOST HAPPINESS) / 문학동네 / 587쪽 / 2020 (2017)